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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07. 2020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리뷰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미쳐야 도달이 가능한 세상일까.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정신을 잃어간다. 두 가지의 세계가 만나는 일, 호흡이 다른 호흡을 마중 나오는 일, 마음을 흡수하는 일. 그런 것이 사랑일까? 사람은 호수처럼 맑고 깊다. 고운 호수에 비친 드뷔시의 달빛처럼 서서히 우리는 사랑에 스미고 수면 위에 유영하다,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말하자면 정신을 잃는다는 건, 내가 가진 심연을 누군가의 소유로 이전하는 행위니까, 미친다는 말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달빛처럼 녹아들고 끝도 없이 당신에게 스미는 사랑, 말하지 않아도 다가오고 알아가는 사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자기 앞의 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비천한 사람들이다.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만 사랑이 넘친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매춘부, 포주, 희랍인 등 프랑스 주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한다. 조건 없이 서로를 돕는다. 사랑을 기반으로.


《자기 앞의 생》은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라야힌이 언급한 ‘생의 맛’이란 무엇일까. 어떤 맛일지 가늠은 곤란하지만, 달콤한 맛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맛에 취할수록 더 깊은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미칠 수밖에 없는 맛, 그 황홀하게 쓴맛에 빠져 우리는 미친 삶을 감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생의 맛에 영원히 취할 수밖에.


《자기 앞의 생》은 “아무 때고 난 이놈의 층계에서 죽고 말 거야”라고 늘 말하는 ‘로자’ 아줌마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모모’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로자 아줌마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태인이자, 전직 매춘부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는 죽어가는 아줌마다. 로자 아줌마는 아이들을 의탁 받아 기르게 되는데, 대부분은 매춘부가 낳은 아이들이다. 말하자면 로자 아줌마는 일정한 돈을 받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셈. 로자 아줌마와 모모 역시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 정의한다.


모모는 14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10살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다.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이 왜 아랍계로 태어났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모모를 방황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렇듯, 모모 역시 로자 아줌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아무 데나 똥을 싸는 행위로) 비록 그들은 돈으로 맺어진 관계, 한쪽은 점점 죽어가고 한쪽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처지이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로 삶을 버틴다. 사람은 돈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이를테면 사랑 같은 단어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돌봐주는 줄로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 바탕은 사랑이다. 전반부에는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가 필요했고, 후반부가 갈수록 로자 아줌마에게 모모는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모모는 소설 도입부에서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라고. 하밀 할아버지는 무심하게도 “그렇단다”라고 대답한다. 왜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대답하는 걸까? 모모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아직 사랑을 알려면 더 많은 생의 맛을 봐야 하니까 그랬던 걸까? 어쩌면 헤겔의 변증법처럼,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어떤 기대를 품기라도 한 걸까? 모모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사람이 사랑 없이 과연 살 수 있는지 인생은 직접 살아가면서 깨닫는 거라고. 하밀 할아버지가 끼고 살던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19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는 삶에 숨겨진 어떤 의미를.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모모의 순수함을 엿보는 문장이다. 고작 달걀 하나에 생이 모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다니. 누구나 어릴 적 자신이 제일 소중하다 여기는 대상이 하나쯤 있을 테니까. 그것이 모모에겐 손안에 쥔 달걀이었으리라. 나는 왜 달걀을 보고 헤르만 헤세의 ‘알’이 떠올랐을까? 모모의 달걀, 그리고 생, 한 손에 꽉 쥔 모모의 집착에 담긴 생, 우린 모두 살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생(달걀)을 꽉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넌 창녀가 뭔지 아니?""엉덩이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죠." 모모는 어리지만 안다. 생을 체험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큼 성숙한 아이다. 끔찍한 소리를 이해할 만큼 커버린 모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는 일, 로자 아줌마 건강을 걱정하는 일, 하밀 할아버지에게 가끔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지 묻는 일, 그런 일 따위들.


모모는 자신이 양육했던(?) 강아지 쉬페르를 다른 가정에 입양시키는 일도 저지른다. 운전기사와 딸린 차까지 소유한 귀부인에게 오백 프랑을 받지만, 모모는 그걸 하수구에 처넣어버린다. 그리고 송아지처럼 운다. 사랑이란 모모에게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이가 만약, 비참한 삶을 감당해야 한다면, 더 행복한 곳에서 살아가도록 보내주는 게 옳은 걸까. 모모의 사랑은 양보이자 희생이었을까. 모모에게 사랑은 보내다,라는 동사일지도.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에서 로자 아줌마를 지하실로 내려보낸 것도, 모모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상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늙어가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현상이다. 로맹 가리가 자살을 선택했던 것처럼, 로맹 가리는 모모와 로자 아줌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투영시킨다. 사랑은 그 사람이 내리는 선택을 존중한다. 태어나는 것은 선택하지 못했어도 마지막은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그것이 생을 대하는 고귀한 자세임을.


생의 어두움을 로맹 가리는 따뜻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14살 먹은 소년의 시선은 시종일관 자신보다 타인에게 쏠려있다. 전혀 그 나이답지 않은, 감정적이지 않은 10살, 혹은 14살의 늙은 아이(?)를 나는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 책은 단 며칠 만에 독파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 있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읽고 나서 꽤 고통스러웠다. 너무나 어둡고 슬픈 세계가 내 생을 뒤덮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유서에 남긴 마지막 문장으로 내 느낌을 갈음한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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