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독 다섯 번째 리뷰
똑독 다섯 번째 도서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분량이 적은 덕분에 읽는데 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지만, 읽다 보면 정신이 이상한 세계로 빠지는 듯했다. 훌쩍 커버린 어른이라 아이들의 원더랜드를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어릴 적 이미 읽은 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재밌는 것은《어린 왕자》와 더불어 이미 읽은 책이라 착각하는 대표적인 책 중에 하나였다는 것.
팀 버튼 감독의 3D 영화를 몇 년 전에 본 기억이 있다. 기괴한 캐릭터들이 시종일관 뛰어다녔다는 사실,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가 현실과 지나치게 동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 볼거리는 풍성했지만 특정 장면에서 어떤 의미를 깨달아야 했는지 불분명했다는 사실, 주제가 무엇인지 뾰족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사랑을 받는 루이스 캐럴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담았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역사적인 배경을 머릿속에 주입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특정 장면에 숨은 코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소 엉뚱한 방향과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구조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고 할까.
온갖 은유, 말장난, 패러디가 난무하는 이야기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 1800년대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책을 완독하고 나서야 평론가들의 그럴듯한 분석을 복습하며 고개나 끄덕거렸다. 그렇게 하는 게 그나마 상식의 지평을 넓히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
소설 속에서 앨리스의 몸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내가 달라졌다면 그다음 질문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하는 거야. 아, 〈그 질문〉은 대단한 수수께끼네"라고 말하는 앨리스는 존재론적인 의문에 휩싸인다. 또끼 굴 속으로 빠지기 전의 앨리스나 '나'인가, 또끼 굴 속, 원더랜드에서 몸집을 키웠다 줄였다 하는 앨리스가 '나'인가.
원더랜드, 현실과는 다른 모험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를 자극하는 세상. 나도 가끔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다소 엉뚱하더라도 현재까지 나라고 규정한 모든 형식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주 52시간 반복하는 직장 생활 같은, 나를 규정하는 모든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 번쯤 뛰어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눈을 감고 상상할 때나 잠시 존재한다는 사실.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는 고정관념에 천착해버린 우리의 자의식을 증명하는 건 아닐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문학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사실이 아닐까.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반드시 그리스 신화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이야기들이 넘쳐난다는 이유 때문이다. 고전에서 깊은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소설을 쓰고 싶다면, 상상력을 건드려줄지도 모르니. 나 역시 소설을 쓰고 싶으니 더 집중해서 글을 읽어야 할까.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줄래?"라고 채셔 고양이에게 묻자, 체셔는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라고 대답한다. "어디든 상관없어."라고 앨리스가 대답한다. 이곳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지."라고 다시 채셔 고양이는 조언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용기가 부족할까. 원더랜드와 같은 세계를 창조할 상상력이 부족할까. 방향과는 상관없이 어디든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앨리스처럼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앨리스의 질문과 채셔의 대답은 다시금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답을 정의하게 만든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나였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살면서 차츰 잃어간다는 게 문제였지. 나는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