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독 2기를 마치며.
'똑독'(똑독하게 독서하세요) 모임에서 7월에 같이 읽은 책은 《데미안》이었다. 치열한(?) 투표 끝에 총 34분 중에서 16분이 선택했다. 궁금했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다들 데미안을 읽고 싶어 할까,라고. 고백하지만, 사춘기 시절에 나는《데미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사교 모임에 나가면 나는《데미안》은 읽은 남자라며 허세라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문학동네 번역본을 선택했다. 검색해보니 가장 매끄럽게 번역이 되었다고 했다. 글쎄, 읽어 보니 매끄러운 부분도 많지만 어색한 문장도 꽤 존재했다. 그런데,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생각은 오해였다. 중반을 넘어서 싱클레어가 본격적으로 본인의 자아의 세계와 갈등 겪는 문장이 불만의 원인이었다. 어색한 번역이라는 탓보다, 내가 싱클레어의 내면을 이해하기에 정신적으로 덜 성장했구나, 라는 깊이의 부족함을 깨달은 거다. 싱클레어의 난해한 정신세계를 어색한 번역이라는 문장으로 치부했구나, 라는 것도 알았다. 물론 초반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부분은 무난하게 읽혔다. 이거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소설인데?라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단 몇 시간 만에 읽어버릴 수 있을 거라 자만하고 만 거다.
저마다 사춘기 시절이 다르겠지만, 두 번 이상 읽은 분들이 많았다. 10대에 읽는 데미안과 30, 40대에 읽는 데미안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고초를 당하는 경험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겪었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 백원을 갈취(?)하던 나만의 크로머가 떠오르기도 했으니.
주인공이 사춘기 시절 있었던 혼란의 경험을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책을 읽어보니 내가 사춘기 시절 좀 더 처절하게 보냈다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성인인 된 후 나의 혼란과 절망, 고뇌들이 좀 더 가볍지 않았을까? - heaven 님
싱클레어는 크로머와 조우하며 내적인 방황을 겪게 된다. 10살이라는 나이에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스스로에게 발굴하고 만 거다. 오래된 유물처럼 내면 깊이 간직해 두는 것이 좋으련만, 자신이 가진 암흑의 세상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세계가 꼭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밝음은 선하고 어두움은 악일까? 싱클레어의 정신세계는 어두운 세계 속에서 해체되고 재구성을 하게 된다. 그의 어두워진 내면은 밟게 빛나야 할까? 그것이 합당한 일일까?
개인적으로 데미안의 요점은 이렇다. 한 개인으로서 성장의 이면에 '밝음'과 '어둠'의 양면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 밝음만을 추구한다고 해서, 심연에 웅크린 그림자를 무작정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세상을 향해 마음에 담아놓은 응어리와 분노를 발산한다. 그 강도와 빈도만 사람에 따라 다를 뿐 누구나 이 지난한 시기를 겪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를 어떤 방식으로, 또 누구와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성숙한 자아로 발현되는지가 결정된다. - 라떼파파님
내 안에 있는 신성, 그것은 선악이 아니며 옳고 그름도, 도덕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비난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대로 존재(being)할 뿐이다. 그것은 불변하며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깨어있다. 그것은 궁극의 완성이며 진리이다.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 세계는 마음 가는 대로 무언가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고 프레임을 씌운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은 바로 그 존재를 말한다. 이따금 뇌리를 스치는 삶에 대한 의문과 갈증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불편한 투쟁을 피해 안락한 알 속에 안주하려 한다. 알껍질은 우리의 의지보다 단단하다. - 타마님
소설 데미안은 저에게 거울과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데미안이 청소년 권장 도서에 속해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죠. 문체나 표현만 어렵고 ‘독후감’에 쓸만한 느낀 점이나 주제 의식을 찾기 힘들었죠. 되려 권장 도서 치고 뭔가 모를 은근한 분위기에 설레며 읽었습니다. 한참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꺼내 본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를 통해 그 나이 때의 본인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쓴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울같이 과거의 모습을 비추었죠. 굳이 어른스러워 보이고 음험한 대상을 동경하였던, 허나 막상 그곳에 발을 디디기는 무서워했던 연약한 나. 부모님과 어른에게 하는 맹목적인 반항이 이 세상과 등지는 독립적 모습이며, 정말로 나다운 모습이라 착각했던 그때. 그로 인한 방황과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했던 노력까지도.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은 스스로의 경계와 위치를 인정하고 납득했을 때야 비로소 깰 수 있었습니다. 채 마르지 않은 병아리 몸 여기저기에는 아직 껍질 부스러기들이 붙어 있긴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거울에 비친 싱클레어의 모습을 통해 과거를 직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알레님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아프락사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단어임에는 분명한데 뜻은 알 길이 없다. 검색하니 그노시스파의 신이라고 한다. 그노시스파는 또 뭔데?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놈? 참 해괴망측하게 생겼다. 얼굴은 닭이고 발은 뱀의 형상을 지녔다. 기독교에서는 악마로 여긴다고 하니 얼핏 이해도 간다. 아브라카다브라가 그들의 주문이라고 하는데, 노래 가사가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아프락사스는 신이며 동시에 악마라고 한다. 무서운 놈이다. 네 놈의 정체성은 뭐냐. 인간은 모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말, 당신은 수긍하는가? 아프락사스를 언급할 때 알이 등장한다. 새는 깨어나려면 자신의 세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알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알이 우주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바깥쪽의 세상을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 결국 알과 투쟁하여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자신 만의 알 속에서 안락을 누린다. 지금 이 순간, 편안한데 왜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 하는지, 차라리 이불속에 드러눕는 걸 택한다. 이 순간 아프락사스는 나에게 속삭인다. "포기하면 편해, 내부나 외부나 어차피 똑같은 세상이야"라고 말이다. 달콤한 말을 부수고 투쟁 끝에 껍질을 깨뜨리는 사람은 내면에 생성된 아프락사스를 극복하는 거다. 어두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밝음도 극복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거다. 우리는 새가 되는 거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악의 입장에서 선은 배척해야 할 개념이며 선의 입장에서 악 역시 배척해야 할 대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악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누가 선이며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힘의 논리에 따라 선과 악은 규정되지 않았나? 인간이 만든 논리에 따라 선과 악은 다른 옷을 입지 않았나? 아 혼란하다.
나는 얼마나 방황했을까? 싱클레어처럼 어린 시절에 방황했어야 하는데 이십 대가 되어서 방황을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언제 행복한지, 어떤 강점이 있는지, 내 꿈은 무엇인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부끄럽게도 학창 시절에 고민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이 진리였으므로 아무런 비판 없이 세상을 수용했고, 부모님이 바라는 삶을 꾸리는 노력만 했다. 그래서 후폭풍이 일었다. 삼십 대 후반에야 알을 깨뜨렸다. 싱클레어가 크나우어에게 한 말처럼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내야 한다. - 일과삶님
온전히 새장에서 나온 건 2년 전쯤이지 않을까? "넌 정말 멋지게 살 줄 알았어.." 데미안스럽게 날 관조하며 꿰뚫어보듯 내뱉는 한 친구의 말에 나름대로 만족하던 내 삶이 20대 꿈꾸었던 삶에 비해 초라한 수준임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갑자기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데미안에게 날 비추어보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누구인지. 난 어떤 열망이 있는지. 왜 또다시 새장 속, 알 속에 있었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세계들의 혼돈에 있는지. - 조앤님
이 한 구절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감정만큼은 또렷하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던 만큼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조금씩 지워지는 책임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들. 원하지 않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나름의 시간들. 그럴 때마다 책 속으로 도망치곤 했다. 적어도 활자들 안에서는 안전하다고 느꼈으니까. 싱클레어의 고백은 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는 물론, 나의 구원자였다. 덕분에 나는 세계를 깨뜨리고 태어날 수 있었다. - 싱클레어님
누구든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면 보호받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된다. 안전함에서 벗어나 불안과 두려움의 세계로 가는 고뇌와 방황이 성장의 과정이다. 자신의 길을 가다 보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다른 동료가 보인다. 이 동료가 자신의 길을 가는데 길잡이이기도 하고 위로의 대상이기도 하다. 카인의 이마에 있는 표식은 한쪽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세계로의 가는 자들의 표시이다. 연약한 아이를 보호하는 알의 세계를 깨고 나와야만 날개를 펄럭이며 드넓은 세계 아브락삭스로 날아갈 수 있다. 이것이 성장이다. 성장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이다. 이마의 표식이 작든 크든 혹은 반짝이든 덜 반짝이든 각각 성장해 가는 과정의 표시이다. - 꾸믈꾸리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난다. 그런데 말이다. 싱클레어가 믿고 따르는 데미안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일까? 싱클레어처럼 성장하는 아이는 인생의 쓴맛을 보며 누구나 데미안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데미안을 만나며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체험하고 어느 세계에 편입될지 결정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는 누구나 자신만의 데미안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 참으로 어렵다.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알 수 없으니 무엇에 도전해도 만족스럽지 않고 다른 경험을 찾아 헤매야 한다. 내 안에 데미안이 있어도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으니 대답 역시 흐리다. 모호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갈듯 하다. 그 이유가 나를 글쓰기로 인도했다. 기승전결 글이다. 나를 찾는 길, 글쓰기가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우회로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알을 깨려고 투쟁을 하는 사람이 맞다.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내가 구축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이유도 찾을 수 있을까. 그 길 참 고독하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일까.
나는 데미안과 함께, 아니, 싱클레어와 함께 "자기 자신이 되려고"노력해보기로 했다. 나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착한 사람-사회가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되기로 했다. 나를 찾아가는 길을 싱클레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 달과님
바쁘고 정신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에서 잠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찾아가는 시간. 그때가 언제가 되더라도 절대 늦지 않다. 주변에 보면 오십 대가 되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다. 지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축복이다. 지난 시간의 방황과 고민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하다. 자신 있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싱클레어 역시 이런 마음이 아닐까? - 일과삶님
친구들의 사회생활 무용담을 처음 접하던 당시 내게 가장 큰 의문이었던 것은 ‘왜 학교에선 이것을 가르치지 않을까’였다. 학교의 교과과정이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내용은 현실에 필요한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크게 와 닿았던 시기였다. 여러 가정들 끝에 어쩌면 매뉴얼로 가르칠만한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데미안의 말처럼 나만의 길을 내가 찾아가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은 누군가가 이끌어 줄 수는 있어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이고 온기가 그립도록 고독한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가다. - 하루님
어린 시절 내가 나의 혼란과 정체성을 깨닫고 들여다보았다면 지금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살고 있을까? 내가 어떤 모습을 꿈꾸는지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아쉬워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다. 나에게 나를 숨기는 게 너무 굳어져서 어렵고 어렵다. 타조알처럼 단단한 나만의 세계를 깨트리지 않은다면 난 결국 알이 전부 인 세계에서 살게 되겠지. 알을 깨는 건 내가 선택하고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 오늘도그래님
현실과 내면의 괴리가 느껴지는 삶에서 결코 정신적 안정도 행복도 느끼기 어렵다. 그런 자신에 대한 불신은 깊어져 가고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내면의 괴리감에 자기 자신을 천재로 때로는 반미치광이로 여기며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과 용기를 갖도록 배우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길을 찾는다. - 유니스님
데미안은 '나'에게 깨우침을 줬지만, 동시에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이전의 '나'는 데미안이라는 외부의 존재로부터 자신을 찾으려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긴 여정의 끝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내 안의 '나'를 발견한다. - dahl님
하지만 나 자신에게로 가는 것, 나 스스로를 탐색하고, 내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지금도 늘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소명은 무엇인지, 나의 길이 이 길이 맞는지를 더듬어 탐색한다. 꺼내 드는 나의 편린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상호 모순적이고, 시기에 따라 장소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한다. 언제가 되어야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때 글을 쓰는 것도, 그래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구도의 길에서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내 앞에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는 자도,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 티라노님
서른이 넘어도 어렵다.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을 게을리했던 나의 탓이겠지.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허나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무엇이.라.도. 잘해내야' 한다. 사실 무엇이든 마찬가지이다. - 한샘님
사람들은 고전을 읽고 철학을 한다. 미에 대한 탐구를 한다. 삶을 살다 보니 무엇이 옳은지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온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등을 탐구를 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필요가 그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리라는 것을 배우고 믿는다. 마치 <스크릿>에서 우주에 외치는 소리처럼. <데미안>은 나에게 그런 책이다. 내가 사는 이 삶의 몸부림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과 내 곁에서 함께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준다. 나도 싱클레어처럼 또 다른 압락사스, 베아트리체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 하은빛님
헤세는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칼 융의 제자에게 정신 분석을 받았다고 전한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내면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옮긴 것이 소설 데미안이었다. 내면과 가까워지려면 깊은 생각이 필수다. 내면에 함몰하다 보면 생각의 바다에서 침몰할 수도 있다. 영원히 알게 갇히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판단한다면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자화상이다. 싱클레어가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은 모두 가상의 세계에 사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철학자 융은 '아프락사스'를 삶과 죽음, 저주와 축복,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양극적인 것을 포괄하는 신성으로 말했다. - 꾸믈꾸리님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에 이 카인의 표적이 언급되었을 때, 조금 경계했다. 오래된 책이기에 혹시 이것이 우울증이나 조증 등의 정신질환을 ‘병’이라는 인식 없이 그저 남들과 다른 무언가! 하고 표현한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헤르만 헤세를 처음 접한 책이 '수레바퀴 아래서'였고 그 후유증이 꽤 길었기에 나도 모르게 경계했다.) 요즘이야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우울증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깨려면 본인이 겪어보는 수밖에 없지만 그러기엔 너무 대가가 크다... 여하튼 잠깐 딴 곳으로 이야기가 세버렸지만, 나의 걱정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읽으면서도 헷갈렸다. 그러나 확실히 다 읽은 순간에서는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상관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정신질환을 잘못 묘사하지는 않았다. - 강철경님
살아오면서 철저히 패배했거나 성공해봤던 양 극단의 경험들도 필요하다. 밑바닥 영혼의 경험이 없거나 자기 한계의 경험이 없는 것은 자기 성숙으로 가는 필수코스를 밟지 않는 것이다. 몰랐던 추악한 본성이나 이면을 체감한 적이 있던가? 어둠의 나락에 떨어져 보면 오히려 그 반동으로 다시 솟아오를 동력을 얻지 않을까? 마치 책 속의 싱클레어가 방탕의 나락 속에 있다가 순결에 대한 열망과 성자에 대한 동경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 신선님
"생각해볼 점이 많았다는 말, 데미안은 중고생이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는 말, 클래식 명작은 나이 들어 읽는 게 맞다"는 타마님의 말씀에 공감한다.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한 인간의 마음 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이 문장은 데미안과 연결이 된다.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싶다.
"신화적 입장에서 수업을 준비한다면 수렵 사회와 농경사회의 갈등으로 이야기할 것도 같아요. 유리왕의 화희 이야기처럼요. 결국 수렵 사회가 직장을 잃고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하은빛님의 해석은 신선했다.
"스스로 깨면 새가 되지만 남이 깨 주면 계란 프라이밖에 안된다고 하는 우스갯소리 아닌 참언"을 해주신 달과님의 말씀도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 부담을 주었던 단어가 '고전', '서평' 이란 것을 결국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책을 읽고 쓰는 글에 '서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그저 나의 주관적 감상이고 생각일 뿐, 내가 뭐한다고 남의 글을 이렇다 저렇다 평評하는가. 그저 내 경험과 생각을 쓸 뿐이다. 그것은 후기 또는 기록이지 평이 아니다. 어쨌든 부담을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록을 남겼다. '고전이 왜 고전인가'라는, 고전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 더 많은 고전을 접하며 그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 흐름님
똑독 2기를 진행하며 고전을 읽는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읽는 이의 영혼을 울릴 것’. 이것이야말로 고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 아닐까'라는 《자유론》에서 접한 서문의 한 문장처럼, 얼어붙은 영혼을 깨우기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는 게 아닐까.
데미안은 다양한 해석을 원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해석은 개인의 투쟁의 역사를 반영한다. 우리는 데미안을 읽고 얼마나 성장했을까? 어쩌면 정체되었을지도 모른다. 질문을 얻기 위해 계속 고전을 찾느다는 흐름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대답을 얻기 위해 고전 속의 세상에서 사는 인물들에게 묻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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