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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7. 2019

소설 <데미안>을 읽고

서평 대신에 소설을 쓰다

어린 시절, 나는 남보다 생각이 한 단계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타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나는 친구들의 공기를 감싸는 거짓 혀놀림, 메마른 입술,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 무엇보다 목소리의 높낮이로 그들의 불안전한 세계를 느꼈다. 나는 말을 듣지 않아도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신경이 꽤 예민한 축에 속했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내면에서부터 뿌리 깊게 자라났는데, 어느 날 그것을 발견한 후 나는 피곤한 인생을 살 것 같은 두려움에 갇혀 한동안 우울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무료함이 싫었다. 일상은 늘 불완전한 세계에 사로잡혀있었으니까, 늘 분주하고 무질서해야 내가 그 세계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학교든, 집이든, 도서관이든 모든 공간이 지루했다. 관계에서 요구하는 친절함은 불편함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는 나의 지시대로 세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완벽한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을 떠나 상상에 빠졌다. 간혹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과거에서 살아가기도 촌지나 주고받는 어른이 되는 부정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상의 겹이 쌓여 현실과 저너머 사이에 영원히 갇히는 건 아닌지.  


상상이 지나칠 때마다 긴 꿈으로 이어졌다. 한번 꿈에 빠지면 가족이 흔들어 깨워도 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헛소리만 질러댔다. 땀에 흠뻑 젖어 겨우 깨어나서도 나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어머니에게 간혹 꿈 이야기를 털어놨지만, 그 나이에 겪는 흔한 성장통이라는 말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미래의 예측인지 단순한 악몽인지 꿈에 다가서기 힘들었지만, 하나의 세계가 해체되고 재건하는 것이 반복되는 걸 보면 미래에 분명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10살 안팎의 내가 꾼 꿈의 세계. 나는 꿈속에서 한 공간으로 옮겨져 있었다. 수십 명은 앉을 법한 테이블이 놓여있고 나는 가운데 검은색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생을 마감하고 나는 어떤 순간으로 이동을 기다리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짧은 생을 마쳤으며 어떤 변고가 나에게 닥쳤다는 것을 상황으로 인지할 뿐이었다. 믿음은 의미가 없었다. 사건은 일어났고 나는 처분을 기다리는 신분이었으니까.


모르는 남자였지만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은 짐작만으로도 충분했다. 얼굴을 느껴 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나는 오직 그림으로 상상하는 것만 가능했다. 만지는 것으로도 촉감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다 왔을까, 나는 어떤 외모를 가졌을까. 어쩌면 큰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곧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걸까. 그래,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단서가 기억이 난다. 나는 교회를 가지 않았어. 친구가 가자고 일요일마다 손을 잡아도 나는 귀찮다는 듯이 늦잠만 잤지. 기도할 때는 진심으로 회개한 적도 없어. 그러니 울어 본 경험도 없었어. 게다가 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아담과 이브도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신을 만들고 신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이었다고 믿지 않았던가. 난 죄를 받아도 마땅해. 신은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근데 내가 지은 죄가 그렇게 무거운 걸까. 신은 위대하고 거룩하니까 혹시 인자하지 않을까? 혹시 냉혹한 존재일까? 내가 두려워하는 신은 내 의식과 무의식이 창조한 허상은 아닐까.


그런데 이곳은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나는 밝은 빛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얼마나 앉아있어야 할까.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나는 목이 마르지도 않고 배가 고프지도 않아. 수십 시간, 아니 수십 년은 흐른 것 같아. 이 고독한 공간에서 나는 축배라도 들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오직 기억하는 것이라곤 내가 저지른 후회의 순간들, 죄악이 담긴 영상들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리 떠올려도 아주 희미한 잔상만 지나갈 뿐이야.


어린 시절, 꿈을 꾸는 세상 속의 나는 미래를 짐작하기 어려운 나이였지만, 미래의 내가 될 주인공인 이 남자가 꽤 많은 죄를 지었음을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차분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으로 이 공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열심히 셈을 했지만, 내가 공상하는 것보다 그 공간은 훨씬 폐쇄적이었고 상상을 가로막는 빛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은회색의 드레스를 걸친 사람이 인자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의 표정엔 지은 죄를 고통스럽게 여기는 인간을 한순간에 허물어뜨릴 듯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고 지금 어떤 처지인지, 비현실적인 상황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전기적인 신호가 나에게 흡수되었고 순간, 모든 이해할 수 없음이 이해할 수 있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당신은 중간계에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선택은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의 선택은 소거되겠죠. 당신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온갖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어요. 물론 당신이 지은 죄 때문에 혹시 벌레로 태어나 단 3일만 살다가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고 두려워하겠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우리는 그 어떤 선택도 강요하지 않아요. 이곳에서 죄와 벌은 큰 의미가 없어요. 당신은 이미 죄를 짓고 그만큼 고통받은 삶을 살지 않았나요? 당신의 시간을 천천히 돌려보았어요. 당신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나 때로 그들을 무심하게 대했고, 사랑을 했으나 누군가를 저버리기도 했어요. 누군가를 미워하다 미움이 지나쳐 질투와 시기로 번지기도 했죠. 성공하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기도 했고요. 당신은 그 순간마다 스스로를 벌했죠. 내면을 응징해야 했어요. 번민이 내면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확대될 때마다 당신의 마음엔 병이 들어섰죠.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굴복한 거예요. 내면과의 진지한 대화를 거부하고 이기려고만 한 결과죠.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착각이에요. 인간은 자신을 너무 몰라요. 내면의 세계를 탐구한다고 하지만 기껏 몇 십분 공상하는 것이 전부죠. 대부분의 인간이 이곳 중간계에서 자신의 삶을 후회해요.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걸 탓하죠. 자신을 자책하고 비하하고 부정하느라 삶을 깎아먹었다고 울기도 하죠. 당신도 마찬가지네요. 다른 사람보다는 내면에게 가까이 다가서긴 했지만. 고통을 더 겪고 싶다면 거대한 바위로 환생하여 바위가 바람과 물에 깎이고 부서질 때까지 수십 억년을 보내는 선택도 가능해요.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는 몇 가지 장면을 내 머릿속에 보여줬다. 그것은 필름처럼 지나갔지만 나는 그 흐름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장면과 행복했던 장면도 지나갔다. 나도 모르는 비현실적인 내가 존재했다. 나는 꽤 차분해졌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붕괴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선택에 따라 나는 다시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 그 삶 역시 고통과 무질서가 가득하겠지. 나는 하나의 세계를 마치고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 처했다. 


짧은 시간, 그는 나에게 가르침을 준 걸까? 그는 신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상상하는 신의 모습은 관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이분법적이었다.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는, 믿음과 믿지 않음 사이에서 분명한 길을 택하라는 종용을 당하지 않았나. 


그래, 나는 선인도 아닌 악인도 아닌 삶을 살았던 거다. 나는 비범하지 못했던 거다. 흐릿한 삶을 산 나는 벌을 받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거다. 나를 탐색해야 한다는 원리에 치중하지 않은 까닭이 역설적이게도 삶을 다시 살아볼 기회를 준 거다. 이곳은 참으로 평화롭다. 고독도 잠이 드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다만 이 중간계라는 지점이 생명과 죽음을 연결하는 경계에 있다는 것은 이해한다. 밝음이 있다는 건 어둠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까. 나는 어둠으로 버려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 다시 살아보자. 인간으로서 완성하지 못한 세계를 다시 구축해보자. 이전의 생에서는 알의 내부에서 껍질을 조금 두드렸다면 다음 생에선 맨손이라도 부딪혀야 하지 않겠는가.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기대는 버리자. 오직 나의 힘으로 완성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어린 시절, 이런 꿈을 반복적으로 꿨다. 나는 갑자기 죽음을 맞은 사람이 됐고 새로운 결정에 직면해야 했다. 이런 꿈은 나를 조숙한 아이로 만들었다. 나는 아이들과 떨어져서 평범한 아이가 벌이는 공상이 아닌, 죄와 벌, 현생과 후생, 진정한 나와 가짜 나라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가끔 외톨이가 되는 선택을 스스로 했으며 몇 단계 앞서 나간 미래 예측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부모님까지도. 


이 모든 게 꿈 때문이다. 나는 꿈처럼 미래를 따라가게 될까? 나는 꿈의 예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예측대로 흘러가는 삶을 따라야 할까. 내 길은 어디에 있을까. 길을 걷는다. 구불구불 길이 마음속 깊이 이어지다 나는 비밀의 숲으로 당도한다. 나는 그 여정의 끝에서 데미안을 만난다. 아니, 그는 싱클레어라고 믿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의 방황에 어른 같은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의 존재를 환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그를 부정하여도 그는 아이 취급하듯 나를 타이른다. 그의 계속적인 눈인사와 나를 꿰뚫어 보는 예리함에 나는 굴복한다. 그의 말없음에 고요함에 불가항력적인 시도에 기괴한 에너지의 흐름에 나의 세계를 기꺼이 내어준다. 내가 쌓아온 질서라는 건 그의 의지와 열망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나의 정체성은 그의 손길로 불타오르다 재로 변하고 만다. 나는 날아오르는 재를 손으로 떠받치다 나의 의식을 살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나는 이제 매서운 광기에 집착한다. 가능하다 믿었던 모든 사실이 부정되고 부정은 혼돈 속에서 탈출구를 잃는다. 광기 끝에 찾아온 건 기나긴 기도뿐이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나는 한 번 더 눈을 감는다. 의식의 괴물이 눈을 뜨지 못하도록 나는 더 깊은 잠에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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