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쓰기 혹은 글쓰기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
몇 년 전 시인이 되겠다는 그럴듯한 목표를 세우고 '신춘문예'에 몇 차례 도전한 적이 있다. 도전 결과는 완벽하게 처참했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첫째, 시인이 되겠다고 아무나 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둘째, 공모전에 통과해야만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셋째, 쓰다 보면 시인 흉내 낼 정도는 되더라." 이 세 가지가 공모전 실패에서 내가 얻은 소득이었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다만 타인의 심금을 울리는 시는 아무나 쓸 수 없다. 만약, 자신이 쓴 시를 보고 울어본 경험이 있다면, 나중에 이불 킥 할 확률이 99.99%에 수렴한다. 고백한다면 나도 그런 경험이 두어 번 있었으니까.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는, 오직 스스로에게 반해버린 '감성 자작시 따위들' 말이다. 말하자면 지난밤, 나는 달과 별의 감성에 취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들뜬 나머지, 쓰다만 듯한 시를 브런치에 업로드해버리고 만 것이다. 다음날 오후, 정신을 차리고 발행한 시를 다시 읽었을 때, 내 시를 읽은 모든 사람의 기억을 친절하게 소환하여 소거해주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어제 오프 글쓰기 특강에서 김정선 작가님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다. 질서를 부여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아나운서들이 말을 부드럽게 하는 이유,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쉬운 글도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쓰는 기술을 배워서이고 그곳에 질서를 부여해서다." 시 쓰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연스러운 과정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해 그만큼의 노력과 연습을 투입한 결과가 아닐까?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시인 안도현의 기술적인 시 쓰기 비법을 전수하는, 일종의 시 쓰기 이론과 실전의 집합체다. 시작법을 논하는 책을 읽어본 경험은 전무하지만, 이 책을 삼독 하는 것만으로도 시 쓰기 위한 기초 근육은 충분히 다질 수 있을 거라 단언한다. 이 책은 시를 쓰기 위한 26가지의 구체적인 시작법을 설명한다. 자세한 목차는 온라인 서점의 소개를 참고하도록 하자.
26가지의 목차 중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시를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 시인의 이론이었다. 이 말은 좋은 시를 많이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인의 문장이 가슴에 스며든다는 걸로 해석될 것이다. 무엇이든 모방이 첫 번째다. 창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내 가치관과 시적 감성이 영글기 전에 타인의 시를 읽으며 그들의 언어를 내 가슴속에서 숙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라는 에피소드에서 시 한 편에도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예전에 시를 쓸 때, 왠지 시 한 편이 정제된 하나의 단편소설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묘하게도 시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책은 분명 시를 쓰는 방법을 논하고 있으나 '글을 쓰는 법'이라고 바꿔도 손색이 없었다. 예를 들어,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전에 백 권의 책을 읽어라"로 ,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하라"는 "지독히 짝사랑하는 작가를 구하라"로, "제목은 시 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는 "제목은 글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로,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는 "글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로 들렸다. 그 밖의 시인의 다른 조언조차 글쓰기에 적용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이 세계도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시간, 또 시간의 소요가 문제다. 늘 시간이 없다고 애꿎은 시간에게 잘못을 전가시키고 있으니 개선될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글 쓰는 사람이건 시를 쓰는 사람이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라는 숙제가 남는다. 시간 탓을 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쓰는 게 중요하다. 시든 글이든 입 닥치고, 책상 앞에 앉아 쓰는 게 우선이라는 얘기다. 자, 당장 책상 앞으로 달려가자.
시 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두고두고 볼 책이다. 오랜만에 삼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읽은 책이었다. 물론 이 책을 삼독 한다고 시가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말대로 퇴고를 끊임없이 즐기는 자세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시는 좋은 시를 많이 읽고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고쳐 쓰는 것을 밥 먹듯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 가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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