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늘 봄처럼 살아나서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돌아옴


By 공심


다리가 아주 기다랗고

얼굴에 멍이 선명한 아이가


껑충껑충 숲 속을 뛰어넘어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날


다정한 바람에게

안녕, 인사를 전하면

휘청, 헛걸음질 치고


넘어지지도 않고

잘도 넘어가네


그래도 있잖아


배회는 하지 말자

세상은 아직 어둡단다


너무 빨리 오지 않아도 돼

시계는 지난겨울 땅속에 묻어두었잖아


서럽게 울지 않아도 돼

엄만 꼭 돌아올 테니까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의 간극 때문이었을까. 가벼움과 무거움 때문이었을까. 하늘과 맞닿은 가지들부터 일제히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길고도 아득한 물결들의 행렬이 일제히 몸을 투명하게 흔들며 가지와 가지 사이를 웅성거리며 통과하자, 작은 잎들이 간지러운 듯 옅은 비명을 질러댔다.


수군거림 사이로 햇살이 스몄지만, 숨을 곳을 찾지 못했으므로 빛이든 바람이든 아니면 기다리던 당신의 소식이든 모조리 통과될 기세였다. 쏴아, 바람이 기다랗게 춤을 추더니 꼬리를 남긴 채 달아났다. 언덕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잎에서 하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간혹 하늘에서 땅으로 흩어져 내렸고 소강상태를 보이다 다시 움직였다.


“벌써 봄인가.”


봄은 낮은 곳에서 몸을 웅크리다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가혹함을 뚫고 어떤 기운이 돋아난 모양이었는데, 그것의 기운은 연두색 잎의 흔들림으로부터 피어나 낮은 땅들에게 서서히 퍼져 나갔다.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 봄을 맞기엔 마음 한구석이 덜 다듬어졌다는 생각 때문에, 내 마음은 여전히 겨울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Spyna_m1__Wv3nnvSH73NAvwmx4.jpg


작은 눈을 더 크게 떴다. 멀리 보거나 많이 보기 위해… 그럴 수는 없거나, 그래도 되는 세상의 사연이란 건 봄이 아닌 계절에는 찾을 수 없지 않을까.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그냥 흐름을 인정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봄 이란 건… 우린 모두 세상에 동화되어가는 존재니까. 흐름만 따를 뿐이었다. 그럼에도 봄을 생각하면 눈 속에 파묻어둔 사연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완벽하게 지워졌을 거라고 믿은 당신과의 마지막 그날도, 아니 처음의 설렌 기억도 모두 일어났다. 그러니 겨울이 빨리 끝나고 곧바로 봄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여, 굳이 그런 것까지 트집 잡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겨울 눈이 녹아내리듯 우린 언젠가 지워지고 말 테니까.


세상은 늘 정숙하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진행될 따름이니까.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아주 높은 곳, 어쩌면 하늘보다 더 높은 곳을 보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을 들춰내려 혼자 궁리하는데, 어디서 찾아온 회색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그래 같이 보자. 어디든 같이 보는 것도 좋겠다. 손을 내밀었지만 당신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지만.


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흐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말린 귀를 돌돌 풀었다. “들어 봐라, 바람의 나부낌을, 나뭇가지가 바람을 흡수하는 냄새를, 흙의 사부작거림을, 그리하여 쓸려나간 잎의 상처를 하나하나 돌아보라.” 들리지 않았다. 아니었다, 서서히 나무를 밟고 하늘로 기어오르는 소리, 아래 발자국을 지우는 소리가 심연 속에서 울렸다. 난 진공 상태에 빨려 들었다. 나는 어둠을 사유했고 영원한 무의 세계를 창조했고, 생명이 생기기 이전 세대로 환원됐다. 내 손엔 기억이 소환됐다. 글자인지 그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림자들이 손바닥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손끝에서 바람 하나가 길을 잃더니 또르르 굴렀다. 심연의 진동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정든 속삭임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손금을 따라 느릿느릿 흘러갔다. 나는 그 순간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삶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 순간 봄처럼 살아서 세상이 나의 심연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왔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