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순간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던 그날이다.
1988년 일곱 살 여름에, 내게는 동생이 생겼다. 엄마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출산을 했다. 꽤나 난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생은 태어날 때 몸무게가 4.5kg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연분만이 어려워 제왕절개로 출산했을 무게인데 당시 엄마는 집에 산파를 불러 아이를 낳았다.
방 안에서 엄마는 출산의 고통에 소리치고 있었고 문 하나를 사이에 둔 부엌에서 나는 오빠와 밥을 먹고 있었다. 누가 차려준 밥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빠, 우리 엄마 죽으면 어떡해”
“나도 몰라- 어떡해”
계란후라이와 햄에 케첩을 찍어 먹으며 일곱 살 여덟 살 두 아이가 앉아 이런 류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태어나는 과정에서 동생은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뇌병변 장애를 갖게 되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병원에 밥먹듯이 입원을 했고 손과 발이 오그라드는 ‘경기’를 자주 했다. ‘경기’를 안 하게 해주는 아주 독한 ‘빨간약’을 하루에 한두 번 꼭 챙겨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수술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난 혹시나 약한 동생이 죽을까봐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작고 귀여운 아이의 몸에 더 이상 주사바늘을 끼울 데가 없어 머리에 바늘을 끼워 넣을 때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병원에 가서 낳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괜히 집에서 낳느라 그랬다며 엄마는 두고두고 얘기를 했다.
엄마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당연한 듯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엄마가 환갑을 넘은 지금까지도 할머니와 한 집에 살고 있다.
엄마는 스물한 살에 오빠를, 이듬해에 나를 낳았다. 그리고 28세에 동생을 낳아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출산 후 몸조리를 해본 적이 없다 했다. 오빠가 태어난 지 보름 만에 할아버지 환갑이었고 집에서 성대하게 환갑잔치를 치러내었다 한다. 그 누구도 엄마의 몸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니 그 시절 어린 엄마가 너무 안쓰럽다. 동생이 태어난 후에는 몸이 아픈 동생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느라 제 몸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이제는 출산을 경험한 엄마로서,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다.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의 엄마가 감당해 냈어야 하는 삶의 무게가 꽤나 무거웠으리라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