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무대, 지성인으로 살기

by 글맛공방

나의 대학 시절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나는 ‘486세대’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속한다―만 하더라도, 대학생은 지성인이라고 여겨졌다. 대학 시절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자네 요즘 뭐하는가?”하고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럴 때 “대학 다닙니다.”하면 “그려? 대학생이면 지성인이지.”하고 말해주시곤 했다. 지금은 대학생을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우리 세대가 대학 시절 지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 하려 했던 데는 이런 사회적 평판의 영향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대학 입학 후 받은 문화적 충격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신입생 환영회 뒤풀이 자리였다. 술이 한 순배 돌고 점차 분위기가 무르익자 선배들은 사회적 철학적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인 분위기 자체였다. 그런 뜨거운 토론과 논쟁의 문화를 접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슴 속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머리 속에는 지적 호기심이 용솟음치는 느낌이었다. 이제 막 상경한 촌뜨기에게 선배들은 하나같이 무척 똑똑해보였다. 주로 대학교 2,3학년이었던 그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일이년만 지나면 저들처럼 똑똑해질 수 있는가?’

대학생이 지성인이라면 나 역시 지성인다워야 했다. 나는 그 이튿날 학교 중앙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졸업할 때까지 여기 있는 책들을 전부는 아니라도 절반 정도는 읽어보리라.’ 그 전까지 나는 지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졸업할 때까지 도서관 장서의 절반을 읽었느냐고? 물론 못 읽었다. 도서관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읽겠는가?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실제로 나는 대학 시절 내내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글을 쓰게 만들었다.


나를 지성인으로 생각한다는 것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이던.” 우리 시절이 그랬다. 희미한 알전구가 그네를 타는 자취방에 둘러앉아 토론하고 논쟁했다. 이런 광경은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천지차이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술자리에서 게임하고 노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나는 우연히 대학생들의 MT를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게임하고 벌주 먹고, 게임하고 벌주 먹고 그러면서 밤새 놀았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우리의 젊은 과거는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요즘 젊은 세대가 보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시절을 거쳐온 우리 자신도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낯설다.

우리 세대에게는 ‘대학생은 지성인’이라는 사회적 평판과 대우가 있었다. 그것에 힘입어 스스로를 지성인으로 만드는 것이 좀 수월했다. 그러나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그런 사회적 평판과 대우가 없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지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결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성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지성인이 되려면 우선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태도의 문제’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자신을 ‘지성인’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게임이나 도박, 술독에 빠져 지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친구와 연예인 이야기나 하며 시간 보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사회적인 문제나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궁금한 것이 있는 데도 지적으로 게을러서 그냥 넘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인의 가면과 진면

흔히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고, 인생은 연극’이라 한다. 이 말에는 매우 깊은 뜻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20대 후반의 여교사가 있다 하자. 그녀는 학교로 출근해 학생들과 마주하기 전에 ‘교사’라는 가면을 쓴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교사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일을 마친 그녀는 애인을 만나러 간다. 그럴 때 그녀는 사랑스럽고 애교 많은 ‘연인’이라는 가면으로 바꿔 쓴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 앞에서 ‘자식’이라는 가면으로 바꿔 쓴다. 학생들 앞에서는 위엄 있었던 그녀가 이번에는 투정 잘 부리는 아이처럼 군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 우리는 학생 앞에서는 선생의 가면, 아이 앞에서는 엄마의 가면, 남편 앞에서는 아내의 가면, 동료 앞에서는 동료의 가면을 쓴다. 우리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역할이 바뀌고, 그 역할에 맞는 가면을 바꿔 쓴다. 그것은 가식적인 것과는 다른 말이다. 우리가 역할에 맞게 가면을 쓰는 것은 숙명적인 데가 있다. 그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이고, 개인은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가면은 완전히 가면만은 아니다. 이를 테면 평생을 정치인의 가면을 쓰고 살아온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요구되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그 사람의 주요한 일부를 이루게 된다. 마찬가지로 철부지처럼 살아온 한 남자라도 한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가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게 되고, 그것이 실질적인 존재의 변화를 낳는다. 가면(假面)이 어느 순간 진면(眞面)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이 어떤 가면을 쓰느냐에 따라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성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지성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규정은 일정한 틀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다. 쌀은 모양이 없지만, 대나무에 넣고 찌면 대나무 모양의 밥이 된다. 대나무가 틀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인’이라는 틀로 자신을 규정지으면, 그에 맞는 알맹이들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던 사회와 인간의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동시에 지성인이 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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