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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19. 2020

쾌락, 그 너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

―영화 〈행복〉에 나타난 현대인의 왜곡된 행복관

며칠 전 인사동에 가서 우연히 사진전을 보았다. 그중 인상적인 작품이 하나 있었다. 위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 언덕길을 정면에서 찍어놓은 것이었는데, 그 옆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낭만이란 언덕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때 생기는 것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을 볼 때도 그랬다. 현대인들이 흔히 쾌락과 행복을 동일시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쾌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서울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영수(황정민 분)은 그런 현대인의 전형이다. 그렇게 쾌락을 추구한 결과 남은 것은 피폐한 정신과 병든 몸뿐이다. 간경변 판정을 받은 그는 애인과도 헤어진다. 클럽을 친구에게 넘기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시골에 있는 한 요양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양원 스텝이자 중증 폐질환자인 은희(임수정 분)을 만난다. 그곳에서 그는 방탕한 도시생활이 주는 쾌락과는 전혀 다른 소박한 행복을 맛본다.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노동, 건강한 식단, 맑은 공기, 소박한 생활, 그리고 은희와의 정감어린 사랑……. 

요양원을 내려와 시골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민 영수는 은희의 보살핌으로 완쾌된다. 그러나 몸이 완쾌되자 영수의 마음속에는 예전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욕망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영수는 식탁에서 이렇게 말한다. “은희야, 너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 않니? 난 지겨운데.”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생활의 평화로움이 단조로움으로, 소박함이 궁상맞음으로, 고통 없음이 자극 결핍으로 전환되었다. 

은희와 헤어진 영수는 서울로 올라와 다시 예전의 방탕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술병이 도진 그는 다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그때 요양원 원장이 찾아와 은희의 위독함을 알려준다. 은희를 찾아간 그는 임종을 지켜본 뒤,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간다. 방탕한 생활과 요양원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영수의 생활은 현대 도시생활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다. 도시생활은 쾌락의 유혹으로 가득차있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쾌락에 몸을 던졌다가 휴식 끝에 지친 몸과 영혼이 조금 회복되면 다시 쾌락에 빠지는 패턴을 반복한다. 이런 생활은 오늘날 문명사회를 사는 현대인들 특유의 것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병적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는 영수와 은희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 나온다. 영수가 요즘 노후자금으로 4억7천이 필요하다며, 그에 대비해야 한다고 할 때,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앞날을 지금부터 걱정해. 오늘 하루 잘살면 그걸로 됐지. 그리고 내일 또 잘 살구. 그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해. 나는.”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은희의 이런 가치관은 너무 나이브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질병, 사고, 불행에 대비하느라 일생을 다 보내고, 그 결과 현재가 행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은희의 생각을 나이브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에 쓰인 엔딩곡은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이다. 가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행복은 쾌락이 아니다. 쾌락이 아니라 고통 없음,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행복이다. 우리는 흔히 포만감, 성행위, 도취, 재물,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과도하면 불행을 낳을 뿐이다. 우리는 쾌락을 쫓기보다 고통을 없애는 데 주력해야 하며, 고통이 없는 상태를 낙으로 알아야 한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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