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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19. 2020

너희가 사랑을 믿느냐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책 〈사랑의 기술〉

칠월 칠석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일년에 한번 사랑을 나눈다는 날이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 것도 남원의 오작교다. 우리 선조들은 칠석날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전설에 가슴 아파하며 성춘향과 이도령 같은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조들의 사랑은 자유롭지 못했다. 상대는 가족이나 중매쟁이에 의해 관습적으로 계약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선택이 자유로워진 오늘날에도 진정한 사랑은 쉽지 않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에 깊은 열정을 바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랑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는 절망한다. 

키에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현대인의 욕망과 사랑에 대한 불신을 오브제로 삼는다. 우체국 직원인 19살 청년 토멕은 자신의 아파트 옆 동에 혼자 사는 마그다를 늘 망원경으로 훔쳐본다. 토멕은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마그다를 훔쳐보지만 나중에는 사랑하게 된다. 그녀의 사소한 생활과 습관, 그리고 연애와 그 파탄까지를 훔쳐본 토멕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을 육체적인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애인과의 헤어짐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마그다는 묻는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토멕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그다는 그의 사랑을 육체적 욕구로 해석해버리고, 욕구를 채워준 후 말한다. “이게 다야.”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사랑이 값싼 욕망으로 매도당하는 것에 절망한 토멕은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한다. 마지막 장면. 병원에서 돌아온 토멕이 침대에 누워있는 방에서 마그다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창을 들여다본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사랑이 욕망일 뿐이어서 불신하는가, 아니면 불신하기 때문에 사랑은 욕망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찬양되어온 사랑에 대한 불경죄가 될 것이다. 사랑은 종교에 의해 윤리적으로 선하고, 예술에 의해 아름다운 것으로 선전되어오지 않았는가? 사랑에 관한 가장 깊이 있는 저서 중 하나인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절대적인 미덕으로 보는 것이나, 사랑을 욕망의 변종으로만 보는 것에 대해 균형감각을 제공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의 목적은 두 개체가 ‘하나’가 되려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그 합일 때문이다. 인간에게 합일에의 욕망은 참으로 근원적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불안은 분리에서 나온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고립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을 추구한다. 이 합일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합일의 길은 퇴행 쪽으로도 나있고, 성장 쪽으로도 나있다. 

퇴행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해 유아기적 욕망을 추구한다. 성장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나태함, 상대에게 기생하려는 욕망, 자신이 가진 불안과 공포의 짐을 상대에게 벗어던지려는 욕망, 부와 권력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으로서의 사랑, 상대를 성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사랑, 굴절된 감정의 배출구로서의 사랑, 상대를 완전히 자신의 내부에서 소멸시키려는 욕망이 거침없이 넝쿨처럼 뻗어서 영혼 전체를 잠식해간다. 그러나 성장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해 자신과 상대방의 자아를 더욱 넓게 확장시켜나간다. 그런 사람은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기반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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