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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08. 2020

비인간적인 경제 위기에 인간적인 경제를 꿈꾸다

장이머우의 〈행복한 날들〉에 나타난 또 하나의 경제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아마 ‘하늘에서 돈 뭉치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다’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로또가 당첨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제도의 출발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을 터이고, 경제 역시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경제 현실은 모질게 비인간적이기만 하다. 

장이머우 감독이, 모옌(莫言)의 소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지네』를 각색해 만든 〈행복한 날들〉은 ‘인간적인 경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퇴직한 공장 노동자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자오.’ 그는 맞선에서 만난 상대는 두 번의 결혼 경력에 아이까지 둘 딸린 뚱뚱하고 탐욕스러운 여자. 그러나 결혼 한 번 못해보고 늙어가는 처지에 있는 자오는 부자 행세를 하며 결혼을 추진한다.  

결혼 자금이 필요해진 그는 후배에게 돈을 꾸러 간다. 후배는 돈을 꿔주는 대신, 공원에 버려진 버스를 개조해 젊은 연인들에게 빌려주어 결혼자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버스에 페인트를 칠하고 침대를 들여다 놓은 일종의 ‘간이 여관업’을 시작한 자오는 여자에게 자신이 호텔 사업을 시작했노라 허풍을 친다. 그러자 여자는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전 남편의 딸, 맹인소녀 ‘우’를 호텔에서 마사지 일이라도 시키라며 자오에게 떠넘긴다. 

졸지에 우를 떠맡게 된 자오는 소녀가 앞을 못 보는 점을 이용, 자신이 다니던 공장 한 켠 에 가짜 호텔 마사지실을 만들기로 한다. 예전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가짜 마사지실을 만들고, 시내의 소음까지 녹음해 와서 틀어놓은 자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자오는 처음에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돈을 주어 우에게 마사지를 받고 팁을 주게 했지만, 곧 경제적 한계에 부딪친다. 무엇보다 자신을 구박하는 계모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번 돈으로 아빠를 찾아가겠다는 꿈에 부푼 우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자오와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돈까지 스스로 만들기로 한다. 눈을 감고 만져보았을 때, 재질이 비슷한 종이를 화폐 크기로 잘라 만든 가짜 돈은 우에게 팁으로 지불된다. 

남들에게는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가짜 돈. 그것은 우에게도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우는 자오를 떠나면서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아저씨, 처음부터 마사지실은 의심스러웠어요. 모두 연기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제게 주신 돈이 가짜였다는 것도 알아요. 돈은 가짜였지만 아저씨의 의도는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이었죠. 전 속았다는 느낌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 종이돈은 평생 간직할 거예요.” 비록 외부에서는 사용될 수 없지만, 우와 자오,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간적인 가치를 담고 통용되었던 종이돈. 그 돈은 ‘진짜’였다. 그 종이돈을 갖고 우는 자신을 억압하는 답답한 계모의 집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만큼 화폐를 만들어낸다는 영화의 내용은 황당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벤자민 터커 같은 아나키스트 경제학자는 정부의 독점적인 화폐발행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제약을 두기는 했지만―개인이 필요한 만큼 상호부조은행을 통해 약속 어음 형태의 지폐를 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인간이 경제의 노예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며, 경제 제도 역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경제는 어려워지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데만 골몰한다. 그러나 경제 제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이 없다면, 인류는 묵시록적 미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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