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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10. 2020

고독과 외로움 사이의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책 읽기와 생각하기를 동반하는 데 그 역시 혼자 하는 일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글을 쓸 때는 예외 없이 혼자가 되어야 한다. 글을 쓰려면 혼자 있는 것을 힘들어하면 안 된다. 혼자 있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배우나 가수는 퍼포먼스가 끝나면 현장에서 시끌벅적하게 박수와 환호를 받는다. 그러나 글쓰기는 독자의 반응도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책을 낸 작가들이 독자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주된 루트는 인터넷 서점 판매지수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독자서평 정도다. 아니면 블로그에 ‘책 잘 읽었다’고 독자가 인사 남긴 것을 보거나, 강의 현장에서 ‘당신의 책을 읽었노라’ 말하는 독자를 만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독자 반응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 독자를 만나는 경우에도 분위기는 조용한 편이다. 물론 신간 출간 후, 출판 기념회를 갖거나 대형 서점에서 사인회를 갖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베스트셀러 작가나 유명인사, 연예인이 책을 냈을 경우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책을 낸 후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용히 지내는 경우가 많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작가의 생활은 시끌벅적함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가 되면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질까, 좁아질까? 흔히는 넓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강의요청이나 독자와의 만남 등으로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글을 쓰기 때문에 좁아지기도 한다. 특히 나처럼 인문사회 쪽 글을 쓰다 보면 특정인을 비판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판의 대상이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척을 질 각오도 해야 한다. 권력이 있거나 유명세가 있는 사람들과 친분관계 갖는 것도 조심하게 된다. 언제 글 속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판의 칼날이 무뎌지는 것은 대부분 친분과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비판에 방해물을 만들기 싫다면, 친분과 이해관계를 최소한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지적 독립’이다. ‘독립’이란 말 그대로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서는 것을 말한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이 지적 독립이다. 지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대학을 ‘상아탑(ivory tower)’이라고 한다. 상아탑은 ‘현실과 거리를 둔 사색의 장소’라는 뜻이다. 현실과 거리를 둔 장소에서 학문이 이루어지듯이, 지적 독립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그 거리 역시 고독을 발생시킬 수 있다. 

고독이건 독립이건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말이 있다. 바로 ‘홀로 독(獨)’이다. 영어로 고독을 ‘솔리튜드(solitude)’라고 한다. 솔리튜드의 어근인 ‘sol’은 원래 ‘Sole’에서 왔다. ‘Sole’은 ‘태양’이다. 태양은 혼자 있어도, 아니 오히려 ‘혼자 있음(유일성)’으로 인해서 존엄한 존재다. ‘솔리튜드’라는 말에는 혼자 있어서 쓸쓸하거나, 애잔하거나, 소외감을 느끼거나 하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 말에는 오히려 존재의 자긍심이 담겨 있다. 

“고독은 생각의 둥지다(Solitude is the nest of thought).”라는 말이 있다. 유명 작가들 중에 이와 비슷한 말들을 한 사람들은 많다. 타이완의 작가 쟝쉰(張勳)은 『고독육강(孤獨六講)』에서 “고독이야말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으로 ‘자기만의 방’을 든 것도 혼자 마음껏 사색할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자유와 고독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했다. 글은 지적 탐험의 산물이다. 고독은 자유롭고 깊이 있는 지적 탐험을 가능케 한다. 많은 작가들이 고독을 찬미한 이유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혼자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지만, 외로움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데 혼자 있는 것이다. 고독이 자족이라면, 외로움은 박탈과 결핍을 의미한다. 키케로가 “고독 속에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 적은 없었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도 『무지한 스승』에서 “진리는 고독하게 자기를 의식하는 인간에게만 말을 건넨다”고 썼다. 고독이 긍정적인 것은 자기 관계의 가능성 때문이다. 혼자 있어야 온전히 자신, 혹은 자기 내부에 표상된 세계(타자)와 교호할 수 있다. 

우리는 간혹 글쟁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발설하는 사람은 가족이든 친구든 절연하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싫어 일체의 문학상도 거부했다.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 역시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해 살았다. 미디어의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공원을 조용히 거닐고 싶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법정 스님 역시 오랜 기간 은둔생활을 했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20년을 생활한 것 외에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7년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생활은 기행이나 신비주의에 입각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고독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유명 작가, 특히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점이다. 실은 이것이 은둔의 요체다. 은둔은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 현상이다. 찾는 사람들도 없는데, 혼자 산다고 해서 은둔이라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은둔이 아니라 고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작가는 고독을 필요로 하지, 고립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누구보다 사회와 왕성하게 소통해야 한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야 하고, 그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 쓰는 것이다. 작업 공간의 문제도 그렇다. 보통은 글 작업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옆에 누군가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이 글쓰기에 방해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말이다.)  

나도 이런 이유 때문에 혼자 살 때, 카페에 가서 작업한 적이 있다. 사실 나 같은 인문사회 작가들은 시인이나 소설가와 달리, 글 작업에 적지 않은 참고문헌이 필요하다. 그래서 카페에서 글쓰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집에 혼자 있는 것이 글쓰기를 안이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면, 참고 도서와 노트북을 바리바리 싸들고 카페에 간다. 카페에 가면 사회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 글을 쓴다는 느낌이 든다. 카페 안에서 일하는 사람, 누군가 만나 대화하는 사람, 책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역시 글쓰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심지어는 카페의 적당한 소음도 도움이 된다. 사람의 집중력이란 게 묘한 게 있어서 어느 정도 방해물이 있어야 그것을 뚫고 발휘된다. 

앞서 말했듯이,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그러나 고독이 외로움으로 전화(轉化)되는 경우도 많다. 책을 내거나 글을 써도 시장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 고독은 언제든지 외로움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 고백컨대, 나도 내가 낙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사막을 혼자서 터덜터덜 걷는 낙타. 혹은 변방의 우짖는 개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리 짖어대도 듣는 이 없는 변방의 우짖는 개. 이런 느낌은 소위 ‘잘 나가는 작가’가 되기 전에는 누구나 받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시장에서 ‘잘 나가는 작가’는 극소수다. 그렇게 보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고독과 외로움 사이에서 글쓰기를 해나간다고 볼 수 있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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