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맛공방 Dec 05. 2020

문장의 석화 그리고 꿈틀거림

시의 문장은 어떤 ‘최대한의 문장’이다. 

그것은 한사코 문장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문장에 가깝다. 

영원히 달아나는 문장이고 문장이기를 포기하려는 문장이다.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말을 종이 위에 눌러놓아도 꿈틀거린다는 뜻.

―이영광의 산문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중에서 


나는 한 강의에서 글 쓰는 손을 ‘미다스의 손’에 비유한 적이 있다. 글 쓰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 일단 쓰여진 글은 미다스가 만진 것들처럼 ‘굳는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A는 B이다’라고 쓰면 A는 B가 아닌 측면을 소거시키면서 굳는다. 사물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지만, 글은 그 중 하나의 측면만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굳는다.’ 모든 글에는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있다. 한 방향만을 비춘다. 글은 여러 방향을 비추는 미러볼이 아니라 한 방향만 비추는 손전등이다. 그 방향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 

쓰여진 글은 ‘굳는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종이에 새겨진 글, 특히 인쇄된 글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 인쇄된 글은 누군가 ‘읽고 만다.’ 그런 측면에서 일사부재리이고, 번복 불가능이다. 우리가 말보다는 글을 쓸 때 훨씬 신중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말은 휘발되지만, 글은 남는다. 오래 남는다는 것, 한번 새겨지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 그로부터 글에 바위 같은 무게와 위엄이 실린다.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글쓰기의 두려움도 본질적으로는 이에 근거한다. 

일상 속의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우리는 휴대폰 문자를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이라고 하기에는 일정한 체계와 형식이 부재하고, 초(超)단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휴대폰 문자도 엄연히 글의 성격을 갖는다. 휴대폰 문자는 ‘적힌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는다. 내 휴대폰에도 남고, 상대방 휴대폰에도 남는다. 휴대폰 문자의 ‘글로서의 성격’은 이를 테면 연인 사이에 말다툼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말다툼을 하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내가 그 증거를 보여주마.” 그러면서 몇 달 전 나눈 문자에서 증거를 찾아 보여준다. “봐봐. 네가 보낸 문자야.” 그러면 상대방은 도리 없이 궁지에 몰리고 만다. 이렇듯 평소 별 것 아니라고 여기는, 하찮은 휴대폰 문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말과는 비교되지 않는 위엄과 무게, 그리고 명징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글의 형식과 내용이 어떠냐, 글의 질이 얼마나 좋으냐에 상관없이, 기록된다는 것 자체에서 파생되는 성질의 것이다. 모든 글은 기록되고, 기록되는 한, ‘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장이 꿈틀거린다’는 이영광의 말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종이 위에 적힌 기표(記標, 시니피앙)들은 굳지만, 머릿속에 인식된 기의(記意, 시니피에)들은 꿈틀댄다. 그러나 기의 없는 기표는 상상할 수 없으므로 ‘문장이 꿈틀거린다’고 해도 맞는 말이 된다. 이영광의 말은 시에 대한 것이다. 그 말은 시에 적합한가. 그렇다. 시에 ‘특히’ 적합하다. 시어들은 다른 글들보다 더욱 활어처럼 팔딱거린다. 

그러나 인문적이거나 과학적인 글이라고 해서 ‘꿈틀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문적이거나 과학적인 글도 꿈틀댄다. 그러나 시보다는 훨씬 덜 꿈틀댄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아예 꿈틀대지 않는 글’이라면 쓸 필요가 없는 글일 것이다. 시건 인문적인 글이건 과학적인 글이건 전체적으로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두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 꿈틀거림은 석화(石化)된 것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생명 있는 것을 글로 쓰면 화석이 되는데, 그 화석을 독자의 두뇌가 다시 살려낸다. 

화석이 된 문장은 독자의 두뇌를 만나야만 다시 살아난다. 독자의 눈과 머리는 차갑게 식어버린 문장에 다시금 뜨거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다. 문장이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은 화석 연료가 두뇌라는 엔진을 만나 왕성한 움직임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책들이 가득 쌓인 책장이나 도서관, 그 곳은 문장이라는 화석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거대한 지층(地層)이다. 그 지층에는 일시 동면(冬眠)된 맥박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글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