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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03. 2020

나는 글쟁이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묻는다면 ‘저는 글쟁이입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누군가 내게 ‘당신이 40대가 아니라면, 당신이 아닙니까?’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래도 나일 수 있다.’라고 답할 것 같다. ‘당신이 남자가 아니라고 여자라면, 당신이 아닙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래도 나일 수 있다.’고 답할 것 같다. ‘당신의 이름이 지금과 다르다면, 당신이 아닙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래도 나일 수 있다.’고 답할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이 글쟁이가 아니라면, 당신이 아닙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때는 ‘그래도 나’라고 답하지 못할 것 같다. 글쟁이로서의 속성을 빼는 것은 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왜 글쟁이로서의 나를 소중히 여길까? 남들에게 대접받아서? 어디 가서 ‘작가’라고 하면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주고, 약간의 대접을 받기도 하고, 간혹 존경 어린 시선을 받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대접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급 차별이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전업 작가’라는 직업은 벌이가 시원찮은 직종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작가’라고 하면 ‘정말, 대단하세요!’하고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돈도 안 되는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 나는 왜 글쟁이로서의 나를 소중히 여길까? 자부심 때문에? 글쟁이들이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예컨대 문학을 한다면, 예술 작품으로서 일정한 세계를 창조해내야 한다. 혹은 인문적 글쓰기를 한다면, 특정한 주제에 대해 일정한 체계를 가진 글을 써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성취감을 안겨준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실시되는 분업과 달리 글쓰기는 작업의 기획에서부터 완결까지를 주로 작가가 책임지고, 용의주도하게 끌고 나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산물은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은 그냥 산물도 아니고, 무려 내 ‘정신적 산물’이다. 성취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글쟁이의 자부심 역시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자부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작업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야박하게 평가 받거나, 생계를 온전히 도모할 수 없다면 자부심은 급속히 잠식되어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글 작업 자체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리고 그 작업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고매한 이상과 낭만적 감수성은 ‘뜨겁고 높다.’ 반면 사회적 인정과 평가, 경제적 보상은 ‘차갑고 낮다.’ 둘 사이의 괴리는 딜레마를 낳고, 그 딜레마 속에서 글쟁이들의 자부심은 상처입고, 뒤틀리기 쉽다.

‘나는 글쟁이다’라는 말은 자신의 직업을 정체성으로 삼은 것일까? 흔히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쟁이는 직업이 될 수 없다. 고료나 인세만으로는 정상적인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몇몇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황지우 시인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시인’을 ‘글쟁이’로 확대해도 좋다고 본다. ‘글쟁이는 직업이 아니라 상태다.’ 그 말은 글을 쓰지 않거나,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사유를 멈춘다면 글쟁이가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글을 쓰고,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독서와 사유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글쟁이다.

나는 15년차 전업 작가다. 이 기간 동안 글쟁이로서의 생활 태도와 사상 감정이 조금씩 내면화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떤 일이든 그렇지만, 이 일을 내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잘 할 수 있을지 알고서 했던 것은 아니다. 생계는 위태로웠고, 미래는 암담했다. 그저 하고 싶으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해보는 것이고, 해보니 재미와 성취감이 있으니까 계속했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나의 글을 좋아해주는 독자들도 생기고, 내 글에 대한 사회적 반향도 조금 생겼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 축적되면서 글 쓰는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5년 남짓 형성된 작가적 특성보다는 그 보다 훨씬 오래된 고향, 학벌, 성별, 계급 등이 정체성에 더 부합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쟁이라는 나의 개성은 내가 만들어온 것이지만, 고향, 학벌, 성별, 계급 등은 내게 주어진 조건이다. 전자는 후천적이고, 후자는 선천적이다. 전자에는 나의 의지가 관철되어 있지만, 후자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내게 후자들은 전자와 병렬될 무엇이 아니라, 전자에 수렴되어야 할 특성들로 여겨진다. 나의 고향, 학벌, 성별, 계급 등은 글쟁이로서의 나의 위치성을 드러내는 조건들이자, 때로는 글 작업의 논의 대상이다.

글쟁이의 사전적 정의는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내가 ‘나는 작가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글쟁이다’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글 쓰는 일이나 작가에 대해 필요 이상의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라고 하더라도 글 쓰는 목적이 다 제 각각이고, 그 목적들이 다 고상하고 고매한 것도 아니다. 앞서 내가 ‘고매한 이상’ 운운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글을 제대로 쓸 때의 얘기고, 저속하고 삿된 목적을 갖고 글 쓰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설사 글을 잘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글 쓰는 기술과 위대한 정신은 합치되지 않고 얼마든지 어긋날 수 있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환타지를 가질 필요는 없다. 내 나름으로는 글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저속하고 삿된 욕망이 내 안이해진 의지를 뚫고 내 글에 스며들지 모른다. 사실 작가들은 언어를 다루는 까닭에 누구보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해있다. 작가들은 마음만 먹으면 그 알량한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저속하고 삿된 욕망을 은폐하거나, 미화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쉽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은 남은 물론이고 자신을 속이는 데도 유용하게 동원될 수 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날의 칼이다. 좋게 쓰면 인간과 사회를 개선시키지만, 나쁘게 쓰면 웬만한 범죄를 훌쩍 뛰어넘는 악덕을 행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진부한 표현,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펜은 선용될 때도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악용될 때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인간은 의식이 발달한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로 생각한다. 글쟁이가 주로 언어와 지식을 다룬다는 것, 그것은 달리 말하면 타인의 생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조작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나는 글쟁이다.’라는 말에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일정 부분 담겨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오만이나 자기과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류 문명 역사는 글과 함께 본격 시작되었다. 글쟁이는 여전히 인류 문명의 첨단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글쟁이는 자신의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의식해야 한다. 글은 인류 문명의 절대반지다. 그것을 운용할 수 있게 된 자는 두려움을 갖고 섣부르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늘 자신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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