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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20. 2020

고전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장 폴 사르트르      


속물교양의 최전선에 고전이 있다

오래 전 일이다. 나는 일 때문에 유명 어학원 사장을 만난 적이 있다. 전국적으로 영어 학원을 갖고 있는 꽤 규모가 있는 어학원이었다. 당시 나는 몇 권의 동양철학서들을 낸 후였는데, 그것을 본 사장이 나와 대담을 하고, 그것을 자사(自社) 사보에 싣고 싶다고 해서 성사된 만남이었다. 영어 학원으로 자수성가했다는 그는 한문교육학과 출신이었다. 그는 영어 학원을 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교육 철학은 사서삼경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한학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자부심을 줄곧 강조했다.

그는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투자를 얻어내는 데 한문학적 소양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담당자 앞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자신의 교육철학을 논했더니 꺼뻑 기가 죽으면서 투자를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투자는 철학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의 가능성을 보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을 술술 읊어대는 영어 학원 사업자가 뭔가 ‘있어 보였겠다’ 생각은 한다. 투자 유치가 그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부수적인 도움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고전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고전만큼 어디 가서 아는 척 하기 좋은 것이 없다. 대화를 하다보면, 고전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의기양양해지고, 모르는 사람은 괜히 주눅이 든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고전을 마땅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여기는 것, 가능하면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 고전 강의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속물교양의 최전선에 고전이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용어를 빌리자면, 고전은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를 나누는 ‘구별짓기’ 기능을 한다. 

어떤 사람의 지적 수준을 가늠할 때 가장 많이 통용되는 방법은 어느 대학에서 어디까지 학위를 받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학위와 졸업장은 공식적인 ‘구별짓기’이다. 그러면 비공식적인 ‘구별짓기’ 방법은? 고전을 얼마나 읽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학도에게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는지를 묻는 식이다. 읽었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래도 공부를 허투루 하지는 않았군’하고 인정한다. 만약 읽지 않았다면, 설사 명문대 석박사라 해도 ‘그런 당신이 역사학도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무시를 당할 수 있다.   

   

고전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전의 위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널리 알려진 책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온다.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명품에 대한 광고가 대중적인 신문잡지에 실리는 것을 본다. 명품은 너무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사기 힘들다.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돈을 들여 광고하는 것은 재정 낭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것은 쓸데없는 행위가 아니다. 일반인들이 그 물건의 존재를 알아야, 명품을 소비하는 데 따른 ‘과시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명품의 가치는 그것을 살 수는 없지만, 그것을 소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도 마찬가지이다. 고전은 흔히 말하듯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책”이다. 유명하다는 점에 보편성이 있고, 잘 읽지 않는다는 점에 희소성이 있다. 이러한 보편성 속의 희소성이 ‘구별짓기’를 가능케 한다. 사람들에게 플라톤이나 아담 스미스의 책을 읽었다고 해보라. 그것은 자랑이 된다. 그러나 에밀 시오랑(그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이다)의 책을 읽었다는 것은 자랑이 될 수 없다. 많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전은 좋은 책인가? 맞다. 고전은 대개 좋은 책이다. 그러나 좋은 책이라고 해서 모두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고전이 된다. 고전이 되기 위한 요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위자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보는 책이라도 권위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고전이 되지 못한다. 권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은 ‘고전’이 아니라 그냥 ‘베스트셀러’이다. 고전은 지적 위계를 전제로 한다. 일반 독자가 아니라,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역사에 남을 만한 명저다’라고 인정해줘야 한다. 고전은 기본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추천에 의해 대중적 명성을 얻은 책이다. 

고전이 되느냐 마느냐는 권력과의 야합에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달려있다. 권위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도 결국 권력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일찍이 간파했다. 그에 따르면 권력과 지식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지식이 사회적 권위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지식이 가진 정교함이나 객관적 확실성 때문이 아니다. 그 지식이 가진 특정한 정치적 효과 때문이다. 권력은 자신에게 이로운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지식을 진실로 인정하고, 거기에 권위를 부여한다.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고전 역시 시대적 제약의 산물이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권력의 영향과 사회구조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고전에 대한 선망은 ‘권위(권력)에 대한 복종’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고전은 권력에 의해 공인된 진실을 구성한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고전에 대해서도 냉철한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책이 어떠한 정치적 효과 때문에 추천되고 있는지,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 안에 어떤 정치적 효과가 발생되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전도 의심하며 읽어라

간혹 나에게 “고전을 꼭 읽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결국은 읽어야 한다”고 답한다. 고전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 나름의 독서편력에 의하면, 고전이 아니어도 좋은 책들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답하는 이유는 고전들이 우리 현실, 나아가 문명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고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인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고전 한 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렇다. 우선 고전의 내용들은 어릴 때에는 학교 교재를 통해, 성인이 된 후에는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환기되고 전달받는다. 지식인들도 모든 지적 담론을 고전에 기초해 전개한다. 고전의 내용을 모르면, 지식인들의 지적 담론을 이해할 수 없고,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문명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결국은 읽어야 한다. 

고전에 대해 객관적인 눈을 가지려면 그 내용만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고전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 예수의 말들이 적힌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생전에 글자 하나 남긴 적이 없다.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은 모두 알려진 성현들의 말을 누군가가 편집한 것이다. 보통은 이들이 죽은 후, 제자들이나 후계자들에 의해 편집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닌 한, 전해들은 말에 대한 기억의 정확성 여부가 일단 문제가 된다.  

여기에 편집자들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입장과 욕망이 가세한다. 편집자들도 인간인 한, 세속적 입장과 욕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성현들의 말은 첨삭, 가공, 해석된다. 우리는 보는 고전은 그 산물이다. 우리는 성현들의 말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신화화된 책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성현들의 책이 아니라 편집자의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현의 말 속에서 편집자의 입장과 욕망도 함께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전이 현재의 권력질서를 합리화시켜주기 때문에 제도권 내에서 끊임없이 추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일례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같은 책이 그렇다. 별 생각 없이 『법의 정신』을 읽으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자칫 입법, 사법, 행정을 동일한 계급, 동일한 정치적 당파성을 가진 자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현실을 망각케 한다. 『국부론』 도 마찬가지이다. 그 책은 절대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상업자본이 억압당할 때 쓰여진 글이다. 그것은 자칫 자본권력이 국가권력보다도 절대 우위에 있는 현실을 망각케 한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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