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맛공방 Dec 23. 2020

마오리족의 흥망에서 배워야 할 것

영화 〈웨일 라이더〉와 책 〈녹색 세계사〉

1722년 4월 5일 태평양을 항해하던 네델란드 로흐헤펜 제독은 작은 섬 하나를 발견했다. 그의 눈에는 모순된 두 가지 풍경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갈대 오두막이나 동굴에서 생활하며 식인풍습을 가진 미개인들(마오리족)과 6m 높이의 거대한 석상(모아이) 6백여 개. 거대 건축물에는 반드시 고도의 문명이 필요한 법인데, 그럴만한 기술․자원․권력을 찾아볼 수 없는 섬에서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 이상한 섬을 제독은 부활절에 발견했다 하여 ‘이스터’(Easter) 섬이라 칭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여성 감독 니키 카로의 「웨일 라이더」(Whale Rider)는 유럽 이민자들에게 밀려 힘없는 소수 부족으로 퇴락한 뉴질랜드 마오리족에 대한 신화적 희망가이다. 영화는 오랜 옛날 고래를 타고 하와이키에서 뉴질랜드로 건너온 신화적인 선조 ‘파이키아’처럼 강력한 지도자를 간구하는 할아버지 족장와 비범한 지도자적 기질을 보여주는 손녀의 갈등을 주된 모티브로 삼는다. 남성 중심적 전통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할아버지는 족장을 이어나갈 인물이 마오리 족 마을에 남아있지 않음을 절망하면서도 비범한 손녀를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해안으로 떠밀려온 고래를 타고 손녀가 바다로 떠났다가 살아 돌아온 사건을 계기로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족장 자리를 물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족장의 지휘 아래 번영기에 그랬던 것처럼 화려한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영화는 종족의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며 끝난다. 그러나 신화에 의존하여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마오리족의 절망적인 현재를 보여준다. 마오리족 몰락은 가까이는 19세기에 밀물처럼 유입된 유럽 이민자들과의 경쟁에서의 패배로 인한 것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 마오리족은 이스터 섬에서 결정적인 몰락을 맞이한 바 있었다. 클라이브 폰팅이 쓴 『녹색 세계사』는 이스터 섬에서 마오리족이 몰락하게 된 충격적인 진상을 고발한다. 

그에 따르면 마오리족은 16세기만 하더라도 세계 어느 종족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문명의 건설자였다. 고도로 발달한 천문학적 지식, 항해술과 선박조종술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거석 외에도 47개나 되는 신전, 절기에 따라 달라지는 일출의 방향과 각도에 일치하게 지은 정교한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명이 절정기에 이스터 섬 사회는 갑자기 붕괴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대규모 환경 파괴가 원인이었다. 5세기 경 처음으로 소수의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이스터 섬은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그런데 갈수록 인구가 증가하고 씨족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문명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정된 섬의 자원은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 결정타는 조상을 모시는 제단의 거대한 비석인 모아이 세우기 경쟁이었다. 

섬에는 수레를 끌만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수십 톤이나 되는 돌들을 해안의 제단으로 운반하기 위해 나무들을 남획하여 그 위로 석상을 굴렸다. 그 결과 섬의 모든 나무가 사라졌다. 그 결과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나무로 집을 지을 수 없는 건 물론, 카누도 만들지 못해 섬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식생이 사라진 황야가 늘자 작물 수확량이 감소했고, 자원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인구는 급감했고, 문명은 파괴되었으며, 사회는 원시적인 상태로 퇴행했다. 단백질 부족으로 식인 풍습까지 생겨났다. 늘어나는 섬 인구와 문화적인 야망을 한정된 자원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저자는 이스터 섬의 역사를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 문명이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지구 역사의 ‘미니어처’(miniature)로 본다. 우리는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겨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이스터 섬의 마오리족보다 현명하게 살고 있는가.”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전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