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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24. 2020

책을 읽는다는 것

현대의 생활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다. 온갖 감각적인 오락거리들과 상품들이 넘쳐나는 현대에 사람들은 좀처럼 내면의 세계로 눈과 귀를 돌리기 어렵다. 시선이 닿는 곳이면 어김없이 감각적인 광고물과 영상물들이 기다리고 있고,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여러 상품과 놀이들이 즐비하다. 우리의 눈과 귀는 온갖 현란한 색채와 소리의 통로가 되어있다. 현대인의 오감은 상업 유통구조의 일부가 되어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현대인들은 과도한 외부의 자극에 한편으로는 지치고, 한편으로는 중독되어 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외부의 과도한 자극에 지쳐 그것을 차단하려는 욕구와 그러한 자극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그러한 자극이 없으면 몹시 불안해하는 증후군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현대도시문명의 과도한 자극에 지친 사람들은 주말이면 차를 타고 자연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과 핸드폰 없이는 못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외부의 과도한 자극에 시달린 사람은 골치 아픈 게 싫어서 책을 읽지 않는다. 또한 외부의 과도한 자극에 중독된 사람은 책이 다른 오락거리들만큼 오감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까닭에 멀리 한다. 책은 휴식이 되기에는 골치가 아프고, 오락이 되기에는 너무 심심한 물건이다. 골치 아픈 게 싫어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결국 선택하는 것은 다시 TV와 게임과 영화이다. 과도한 자극에 지쳐 자연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은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TV를 켠다. 그는 거대한 요요현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현대인들에게 세계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온갖 미디어를 통해 씹혀진 채로 제공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삼키기만 하면 된다. 인간의 정신은 세계에 반응할 뿐 개입할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과 귀와 머리를 관능적인 미디어에 내맡겨둔 채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소외를 관능적인 과학기술 미디어에 맡김으로써 다시 위로를 받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외의 주범에게 다시 위로를 받는 꼴이다. 

그러나 책을 보는 사람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갖게 된다. 책을 읽고 자신의 머리를 통해 걸러진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정신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본질에 대해 자문함으로써 자기로부터의 소외에서 벗어난다.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여백을 제공하지 않는 미디어들과는 달리(TV나 게임, 영화 제작자들의 주된 목표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책은 독자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을 제공한다. 책을 읽다가 의문 나는 것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나오면, 독자는 잠시 책을 덮어둔 채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책은 인간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어떠한 매체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본래 자극이 없는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없고, 자극이 과도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적당한 자극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이러한 본질적인 욕구는 선정적인 미디어들에 의해 매우 교란되어 있다. 책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에 알맞은 자극제이다.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책을 읽는 사람은 세계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그를 통해 세계와 호흡한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세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세계 속에 자신을 가둔다. 책을 읽는 과정은 주체적 사유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홀로 책을 읽을 때 세계와 나는 동등하게 만난다.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 적극적으로 해석된다. 책을 읽는 순간,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 해석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졸저 <책 읽는 책>에서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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