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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27. 2020

지금 유행하는 인문학의 실체는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속물은 남의 거짓말에 속느니,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 하고자 한다. 그래서 남의 거짓말보다 자신의 거짓말을 더 믿게 된다.―도스토예프스키      


인문학 열풍은 허상이다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이 열풍이다’ ‘인문학이 유행이다’라는 말이 횡횡하고 있다. 시중에는 인문학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서점에서도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책들이 많다. 언뜻 보면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말이거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대학 내 대표적인 기초 인문학인 철학과나 사학과를 보라. 지원하는 학생들이 없어 폐과(廢科)되거나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학과 통폐합이 이루어진 곳이 한둘이 아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도 철학과나 사학과가 남아있는 대학이 몇 안 된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망해 가는데,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유행한다? 이것은 역설적 기현상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시중에서 유행하는 인문학은 ‘본격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 인문학’이고 ‘비즈니스 인문학’이다. 그것은 ‘돈벌이를 위한 인문학’이고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 ‘신자유주의 인문학’이다. 기업 인문학은 자본의 이익 논리에 투항한 인문학으로, ‘경영학의 인문화’, ‘인문학의 경영화’로 정의할 수 있다. 그 정점에는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워렌 버핏 같은 대자본가들의 인문학이 있다.

내가 인문학 열풍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대중들이 여전히 인문서를 안 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문학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정작 책은 잘 안 읽는다. 작년에 나는 한 인문 출판사 편집장을 만났다. 그 편집장에 따르면, 전체 출판시장에서 인문서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고작 6% 정도라고 한다. 

스마트 폰, 전자 게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영향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독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 얼마 안 되는 독서량을 100으로 놓고 봤을 때, 인문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6이다. 물론 본격 인문학 안에서도 강신주나 고미숙 같은 몇몇 스타 인문학자가 나오고, 그들의 책이 잘 팔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얇은 인문독자층 내에서의 쏠림 현상을 유발할 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문학 독서 인구는 전혀 늘지 않고 있다. 인문서를 읽지 않는 인문학 열풍이란 말이 안 된다.     

 

자본 증식에 이바지하는 인문학

2014년 4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연세대에서 개최된 자사의 인문학 행사 ‘지식향연-4월 서막’에서 “인문학적 통찰 없는 면접생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용진 부회장 말고라도 인문적 마인드를 강조하는 기업인들의 발언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혹자는 이를 두고, 기업들이 인문학을 중시한다는 생각을 가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실제로 취업시장에서 인문학과 졸업생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대학에서도 기업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문학과들이 속속 폐과되는 실정이다. 인문학을 죽이는 기업이 인문학을 선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업들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전공 졸업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인문학은 실용적인 학문도 아닐 뿐 아니라, 그런 공부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비판적 사고가 발달하게 된다. 그것은 기업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런 졸업생들을 기업이 좋아할 리 없다. 반면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졸업생들은 단연 경제경영학 전공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업 이익의 논리를 자기 것으로 체화한다. 입사하기도 전에 이미 기업의 사람으로 완성되어 있다시피 한다. 얼마나 부리기 편하겠는가. 경제경영학 전공자들의 취직율이 평균을 훨씬 웃도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용진 부회장 같은 사람들의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우선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것일 수 있다. 인문학은 이익의 논리를 초월한 공평무사함을 추구한다. 기업은 이런 인문학을 옹호하는 포즈를 취함으로써 기업 경영이 단지 이익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 매우 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판타지를 대중에게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기업의 사회적 위상과 권위를 높이는 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아니면 ‘기업 인문학’을 옹호하는 의도에서 나온 발언일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기업 인문학’은 자본에 투항한 인문학이다. 그것은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 인문학이다.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가짜 인문학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자본은 끊임없이 인문학의 유용성을 요구했다. 이윤을 낳을 수 있는가.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궁색하지만, 적극적인 화답이 기업 인문학이다. 그리고 자본 증식에 기여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인문학의 콘텐츠화’이다.  

    

철인이 된 자본가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끝나고 사회주의가 퇴조하면서 우리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리다. 지금도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시대이다. 지금은 어떤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여기서 ‘자유’는 일반 시민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자유, 그 중에서도 ‘초국적 자본의 자유’를 의미한다. 대자본이 세상의 모든 재화를 투기의 대상으로 삼아 국경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자본축적을 이룰 수 있는 자유 말이다. 

모든 권력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원한다. 본래 자본은 자신의 자본축적을 정당화, 합리화하는 논리를 재생산하는 학문체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경영학이다. 그러나 경영학은 경제 영역 안의 담론 생산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자본이 경제로부터 정치, 문화, 과학 등 사회 전반으로 지배력을 확장하고, 새로 확보된 지배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했다. 

인문학은 그에 안성맞춤이었다. 인문학은 세계 전체를 다루면서도 좀 더 고차원적인 관념을 다루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인문학, 그것이 ‘기업 인문학’이다. 기업 인문학은 경제적 생존과 성공을 수기(修己)와 도덕, 그리고 철학의 산물로 포장했다. 대표적인 예로 초국적 자본가 스티브 잡스의 성공은 ‘인문학의 승리’이고, 세계적인 투기꾼 워렌 버핏은 ‘오마하의 현인’이다. 기업 인문학 덕에 대자본가들은 오랜 자기 수련 끝에 목표한 바를 이룬 도인(道人)이나 수도승 같은 인물로 신화화되었다. 

부자들에 대한 선망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철학이나 도덕과 상관없이 단순히 돈 버는 수완에 대한 부러움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큰 부는 오히려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대 이전까지 그랬다. (예수의 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나, 고리대금업에 주로 종사했던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혐오를 떠올려보라.) 부자들이 ‘철인(哲人)’으로 칭송되고, 그들의 사업이 ‘철인 경영’으로 찬양되는 것은 명백히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대학의 기업화와 기업 인문학

사회 기관들 중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대학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대학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교수라는 직함이 보장하는 사회적 프리미엄은 결코 작지 않다. 매체에 기고한다든가 외부 강연을 하는 것은 ‘교수’라는 직함을 토대로 한다. 교수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 정계에 진출할 수도 있고,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으며, 기업의 사외 이사나 고문을 맡을 수도 있다. 물론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발언권’을 얻어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대학도 ‘경영’되고 있다. 그것이 교수들에게 영향을 줄까, 안 줄까? 당연히 줄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단순한 클리셰(Cliché, 상투적 표현)가 아니다. 대학 이사장, 이사, 총장 등 학교 운영자들은 경영학 박사들로 대기업 관료 출신이거나, 재계와 연줄이 있는 인물들이 많다. 외형적으로도 대학은 기업화되고 있다. 캠퍼스에는 기업의 지원을 받아 지은 건물들―이름도 삼성관, LG 포스코관, 하나스퀘어빌딩 같은 식으로 붙여진―들과 입주한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즐비하다. 요즘은 학교기금도 주식에 투자되는데, 그런 까닭에 대학들이 증권시장의 큰손이 되었다. 

커리큘럼도 경영화되었다. 대학마다 산학 협력 프로젝트, 기업 특강, 최고 경영자 과정이 넘쳐난다. 기업인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할 뿐 아니라, 그들을 초빙교수로 임명하는 일도 흔하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오찬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대학의 실태를 이렇게 전했다. “제가 가르치는 서강대만 해도 25개 학과가 있는데 경영학과 학생 수만 20%가 넘습니다. 인문사회분야 학생들도 약 80%가 경영학에 발을 걸치고 있어요.”(월간 <인물과 사상> 2014.2.) 

경영학은 대학 전체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껏해야 역사가 150년도 안 된 학문이 대학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교수들도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기업가적 자아를 먼저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이 자본권력에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 교수가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 사회적 발언을 하기란 쉽지 않다. 부단히 성찰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거나 책을 쓸 때도 내면화된 친기업적 사고와 정서를 반영하게 된다. 많은 교수들이 ‘기업 인문학’ 책을 내는 이유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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