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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29. 2020

한국전쟁, 히로시마, 그리고 클라우제비츠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과 책 〈세계 전쟁사〉

한국전쟁은 20세기에 일어난 전쟁 중 단위면적당 사상자 수(630만여 명)가 최고치를 기록한 전쟁이다. 휴전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힌다. 한국전쟁이 최소공간에서 최대 피해를 낳았다면, 최단시간에 최대 피해를 낳은 사건은 단연 히로시마 원폭 투하이다. 

원폭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2kg의 폭탄이 터지자 3만도의 불덩어리 속에서 20만 명이 즉사했다. 오렌지색 섬광과 함께 유리파편들이 사람의 몸을 뚫었고, 건물과 아스팔트가 녹아내렸으며 전차는 핵 폭풍으로 넘어졌다. 하늘로 올라간 핵분열 생성물은 낙진이 되어 도시로 쏟아졌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적색반점이 몸에 나타났다. 피는 응고되지 않았다. 다시 25만 명이 사망했다. 이 모든 것이 버튼 하나로 가능했다.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렝 레네 감독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영화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현대전의 의미를 묻는다. 2차대전이 끝난 지 14년 후 영화 ‘평화’를 촬영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는 일본인 건축가를 만나 이틀간 사랑을 나눈다. 두 사람은 모두 깊은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다. 전쟁 당시 고향 프랑스 느베르에서 적군인 독일 병사와 사랑을 나누던 여배우는 그가 사살된 후 삭발과 지하실 감금을 경험해야 했다. 당시 일본군이었던 건축가는 히로시마 원폭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 깊은 상처는 서로의 대화를 어긋나게 한다. 대화는 독백에 가깝다. 카메라는 원폭 규탄 시위, 생존자들의 참상, 피해자들은 울부짖음을 클로즈업한다. 감독은 느베르의 절망과 히로시마의 절망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영화 속에는 적도 아군도, 승자도 패자도 없다. 다만 참혹과 절망이 있을 뿐.  

이런 극단적인 야만성은 전쟁의 본성일까? 존 키건은 『세계전쟁사』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화약을 중국인이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기로 전세계를 지배한 것이 유럽인이 된 것은, 중국인들이 대량학살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고방식의 차이였다. 

저자에 따르면 본래 전투란 제의(祭儀), 용감함, 솜씨, 인격의 표현이었다. 주나라와 송나라가 벌인 전쟁에서 일어난 일은 그 전형이다. 왕자가 화살을 메긴 적병과 맞닥뜨렸다. 적병은 쏜 화살이 빗나가자, 왕자보다 빨리 다시 화살을 메겼다. 그러자 왕자가 말했다. “나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너는 소인이다.” 적병은 왕자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정정당당함에 대한 집착이 당시에는 당연했다. 

최초의 대량학살 무기인 소총의 등장은 그 ‘비겁함’ 때문에 비유럽 세계에서 큰 저항을 받았다. 일례로 프랑스 소총부대를 향해 투르크의 맘루크는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 전사 한 사람만으로도 그대의 모든 군대들을 궤멸시킬 수 있다. 그러니 총은 쏘지 말라. 그 무기는 설혹 여인이라 해도 많은 전사를 죽일 수 있다. 어떻게 감히 무슬림에게 총을 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의 반응은 일본에서도 있었다. 유럽식 소총 훈련을 처음 본 일본 병기담당관은 비웃으며 말했다. “군인들이 동시에 똑같은 동작으로 무기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모습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인다.” 일대일로 전투를 벌이는 무사다운 반응이었다. 실제로 16세기 일본의 무사계급은 총포무기를 일본에서 없앰으로써 250년 동안이나 사회적 지배력을 연장했다. 그것이 서양화되기 전까지의 일본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본래 폭력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사들은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자신과 적을 모두 보호하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 전사들은 먼 거리에서 싸움을 하고, 결전에 직면했을 때는 일단 몸을 피하고, 적을 궤멸시키기 보단 쇠진시켜 패배시키는 전술을 택했다. 그로 인해 역사 대부분의 전쟁에서 군사의 10%이상이 사망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류 전체를 자폭시킬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고전적인 명제는 무의미해졌다. 현대의 전쟁은 정치를 소멸시킬 뿐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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