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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Dec 31. 2020

내가 문학서를 잘 안 보는 이유

허물로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허물을 가리지 않는다. 

―『예기(禮記)』 「빙의(聘義)」편     


인문서보다 문학서가 많이 읽히는 이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인문적 글쓰기’ 강의를 오래 했다. 내가 수강생들에게 내주는 과제 중에는 ‘지난 1년간 읽은 책 목록’을 제출하는 것이 있다. 과제를 내주는 의도는 수강생들이 자신의 독서패턴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다. 축적된 과제 데이터에 따르면, 수강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은 단연 ‘문학서’이다. 인문서 비중은 문학서의 절반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문적인 글을 써보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사람들이 이렇게 문학서를 주로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문학 책이 인문서보다 쉽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수필은 지적 수준과 상관없다. 물론 개중에는 박상륭의 『산해기』처럼 어려운 책도 있다. 그러나 그런 책은 극소수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서는 글만 알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인문서는? 인문서는 대중서, 개론서, 학술서처럼 각기 다른 난이도를 설정해놓고 있어 아무렇게나 읽을 수 없다. 독자들은 단계별로 난이도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읽어나가야 한다. 

둘째, 문학서가 인문서보다 정서적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흔히 소설이나 수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낭만적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인문서를 통해 센티멘탈해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중이 선호하는 것은 아무래도 정서적 텍스트이다. 문학처럼 육화되고 생동감 넘치는 글들을 읽다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화자나 주인공에게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성적 텍스트인 인문서는 논리적・분석적・비판적・종합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래서 소설 읽기는 ‘휴식’이 되지만, 인문서 읽기는 ‘일(정신노동)’처럼 여겨지곤 한다. 

셋째, 독서 습관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 작품은 읽은 경험이 있지만, 인문 쪽 글은 글다운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던 문학 작품들 중 몇몇을 기억한다. 「소나기」, 「메밀꽃 필 무렵」, 「운수좋은 날」, 「별」, 「마지막 잎새」 등.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작품들이 어느 정도 흥미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흥미가 성인이 된 후에도 문학 작품을 읽게 만든다. 그러나 인문적인 글은 어떤가? 아마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김구의 「나의 소원」 정도가 떠오를까? 학교 교육을 통해 인상을 받을만한 인문(사회과학)적인 글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읽지 않는다.      


문학의 재료로써의 인문사회과학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 동화로부터 독서를 시작한다. 동화도 문학에 속하니, 모든 독서는 문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가 ‘문학’ 분야에 갇혀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독서 수준이 정체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지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독서패턴이 문학에서 인문학으로 옮겨가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소위 ‘지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이 무엇이겠는가? 소설이나 수필이겠는가? 아니면 자기계발서이겠는가? 지성인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은 결국 인문사회과학서일 수밖에 없다. 문학가라 하더라도 ‘지성인’이라 부를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열성적인 ‘인문독자’이다. 대개 열정적인 ‘인문독자’였기 때문에 훌륭한 소설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은 ‘개연성이 있는 허구’이다. 개연성은 ‘현실에서 일어날만한 가능성이 높은 것’을 말한다.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소설가는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현실을 가장 정치(精緻)하게 보여주는 것은 인문사회과학서이다. 많은 소설가들은 인문사회과학서를 탐독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적 메시지들을 문학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작품을 써낸다. 

1년에 지방지 포함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작가의 수는 50명쯤 된다. 그 중 10년 후까지 꾸준히 글 쓸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아마 10% 내외일 것이다. 등단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등단 후 꾸준히 쓰는 것이다. 꾸준히 쓰는 사람과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문적 사유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인문적 사유능력이 있는 사람은 글감이 넘쳐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몇 편 쓰고 나면 쓸 것이 없다. 작가가 오랜 세월 동안 글을 쓸 수 있는 저력은 평소 인문사회과학서를 얼마나 탐독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문학서를 잘 보지 않는 이유

나는 본래 시인이 되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학 때까지는 문학서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보지 않는다. 가끔 시는 읽지만, 소설이나 수필은 거의 보지 않는다. 이유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문사회과학서와 비교해, 투자하는 시간 대비 얻는 것이 적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봐야 비로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다 읽어도 얻는 것이라고는 쭉정이 같은 메시지인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들은 소설이 재미가 있어서 본다고 말한다.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긴장, 스릴, 상상력, 유머, 낭만성, 휴머니즘 같은 것들 때문이다. 확실히 소설에는 오락적 요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장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소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마찬가지로 현실 망각, 현실 도피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 지력이 발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책이 사회적 인식을 분식시키는 기능을 한다면, 지력을 정체시키거나 쇠퇴시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학가의 상상력이라는 것도 생생한 현실을 따르지는 못한다. 미국의 9.11 테러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번의 세월호 참사를 보라. 현실은 늘 상상 그 이상이다. 물론 현실을 잘 반영하는 소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현실을 보는 것은, 에둘러 보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는 생생한 현실을 직접 다룬 논픽션들이 많다. 이런 책들이 지천에 깔렸는데, 무엇하러 굳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가공된 현실을 보겠는가? 재미의 측면에서도 현실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훨씬 흥미진진하고 스펙타클하다. 

소설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미의식을 중시한다. 그리고 미의식을 작품 속에 구현하려 노력한다. 그럴 때 예술가가 범하기 쉬운 잘못이 있다. 현실을 실제 이상으로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가 현실을 실제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렇게 미의식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하고, 비참한 사회적 현실을 은폐하고, 그것을 견딜만한 것, 나아가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유미주의 작가들은 미를 초월적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미의식’은 세계를 초탈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적인 가치라는 것도 사회적, 도덕적 가치 지향 하에 있어야 한다. 가치 지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그 폐해를 미시마 유키오에게서 볼 수 있다. 『금각사』 의 작가로 순수 미의 상태를 동경한 유미주의자였던 그는 1970년 일본 자위대 주둔지에 난입해 군국주의와 절대천황제에 대한 신념을 설파하고는 할복자살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자의 정치사회적 의식수준이 이 정도였다. 그것은 노예의식이었다. 

미의식은 절대선이 아니다. 인문적 가치 방향이 없는 미의식은 자칫 군국주의나 파시즘, 제국주의 같은 저급한 이데올로기와 결탁해 그것을 은폐하거나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문학에서의 미의식은 언어에 대한 숙련된 기술과 탁월함을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그 기술과 탁월함은 도덕적 판단, 사회적 판단을 대신하거나 그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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