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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Jan 08. 2021

강요된 독서가 책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린다


학교는 예의를 우선 가르치는 곳인데, 매달 시험을 보아 경쟁하게 하는 것은 결코 교양의 도가 아니다. ―『소학(小學)』 외편(外篇) 선행(善行)     


현대인이 경험하는 일생의 독서 패턴

가끔 독서 관련 강의를 가면, 이런 질문을 흔히 듣는다. “독서를 열심히 하고 싶기는 한데, 막상 책을 펴면 재미가 없어요. 어쩌면 좋을까요?” 여기에서 “독서를 열심히 하고 싶기는 한데”는 ‘나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막상 책을 펴면 재미가 없어요.”라는 말은 ‘그 의무감 때문에 책을 펼치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해보니, 독서가 재미가 없더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재미 없을만한 상태에서 책을 읽었더니, 역시 재미 없더라’는 것이다.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세상에 억지로 하는 것치고, 재미있는 것은 없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강요된 독서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자기 관심과 상관없는 책을 볼 것을 강요당한다. 책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단연 교과서와 참고서이다. 이 경험의 해악은 너무 뿌리 깊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흔히 ‘독서’하면 ‘지겨운 일’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인생의 독서 패턴을 보면 대개 이렇다. 책을 가장 많이 볼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의 아동기이다. 이때 독서할 시간이 가장 많다. 부모들도 열성적으로 책을 사준다.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교과서나 참고서 외의 책은 안 보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입시 경쟁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다니는 학원의 수, 입시공부 시간이 대폭 증가한다. 자신의 내적 욕구에 따른 독서를 할 여력이 사실상 없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책 몇 권 안 읽고 모두 보낸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시간은 생긴다. 그러나 여전히 책은 안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입시준비로 모조리 차압당한 청소년기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1년 정도는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쯤 되면 입시공부로 혹사당한 뇌는 이미 책 자체에 대한 흥미를 상당히 잃은 후이다. 그러다 대학 2학년이 되면 다시 취업 준비. 졸업 때까지 각종 스펙을 쌓느라 정신없다. 그리고 사회인이 된다. 그는 이제 책 읽지 않는 사람으로 완성되었다. 가끔 책을 읽기는 하지만, 대개는 학창시절과 마찬가지로 ‘안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책’(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 실용서)을 아주 조금 읽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독서 현실이다.    

  

스티커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

EBS 다큐멘터리 중에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이 등장한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한 선생님이 초등학교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자, 여기 있는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빼서 읽으세요. 선생님은 여러분이 읽은 책 한 권을 가져올 때마다 스티커를 한 장씩 줄 거에요.” 이 말을 들은 아이들의 관심은 곧장 책에서 ‘스티커’로 옮겨왔다. 아이들은 남보다 더 많은 스티커를 받기 위해, 대충 책을 골라 빠르게 책장을 넘긴 다음 스티커를 받으러 선생님에게 달려오기를 반복했다. 

가장 많은 스티커를 받은 아이가 한 권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2분에 불과했다. 그 아이는 책을 제대로 읽었을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 책 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아이들이 주로 쉬운 책을 골랐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유아들이나 보는 그림책을 선택한 아이들이 많았다. 내용이 쉬워야 더 빨리 읽을 수 있고, 그래야 더 많은 스티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은 대학생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학생들이 선택하는 강의의 기준은 시험문제를 쉽게 내고, 학점을 후하게 주는 교수의 강의이다. 스티커를 위한 공부는 이런 식으로 하향평준화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주로 점수, 학점, 학위,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한다. 나아가 학벌이 가져다주는 부와 권력을 위한 공부를 한다. 모두 ‘스티커를 위한 공부’이다. 이론적으로 시험은 지적 성취도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본말이 뒤집힌다. 사람들의 관심이 점수에 집중되면서 공부의 근본적인 성격이 변화된다. 스티커를 위한 공부를 하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를 통해 얼마나 지적 욕구가 채워졌는가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자기 소외의 공부’가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보통 20년 이상 공부를 한다. 그러면서도 지력이 발전하는 느낌이 별로 없다. 그것은 자신의 내적 욕구와 관심에 따른 공부가 아니라 ‘스티커를 받기 위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어떻게 지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시험에 합격하면, 그간 공부했던 내용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히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목표한 스티커를 얻은 만큼, 우리 두뇌는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다. 스티커를 위한 공부는 가짜 공부이다. 사회적으로 그런 공부가 주가 될수록 인간의 정신과 지력을 발전시키는 진짜 공부는 희귀해진다.        

 

나는 어떻게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게 되었나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독서를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지금도 즐겁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내가 본래부터 공부를 좋아한 줄 안다. 아니다. 반대였다. 나는 공부를 무척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학교공부는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고, 성적은 형편없었다.

집은 가난했다. 부모님은 자식들 먹이는 것만 신경 쓰기에도 바빴다. 자식 성적에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 덕에 나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다. 만약 공부하라는 잔소리에 시달렸다면, 아마 나는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잔소리 속에서 억지로 해온 공부가 뭐가 좋다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하겠는가. 아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해방감에 기뻐했을 것이다. 

나는 학교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안 본 것은 아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장식용으로 사다놓은 『김찬삼의 세계여행』과 『한국문학전집』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학교 공부보다 이런 책들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책에 나오는 그림이나 사진을 구경하는 수준이었고, 나중에는 호기심에 깨알 같은 글씨도 모두 읽었다.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독서와 관련해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았다. 그냥 궁금하고 심심해서 본 것이었다. 그것은 공부보다는 놀이에 가까웠다. 

독서를 강요한 사람이 없으니, 책과 나 사이에 긴장과 갈등 관계가 성립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독서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해방이었다. 책 속에는 내가 모르는 진기한 세계가 있었다. 나는 독서를 통해 내가 경험하는 세계보다 훨씬 큰 세계가 있음을 짐작했다. 독서를 하면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벼락치기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나는 학교 공부보다는 자유로운 독서에 치중했다. 그 결과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책보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독서에 대한 강요보다는 책을 읽을 만한 환경―독서할만한 여유와 책을 쉽게 접할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이 해주어야 하는 일의 거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아이들은 더 그렇다. 일정한 조건만 마련해주고, 진득하게 기다려주면 많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에 흥미를 보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율성이다. 아이들 스스로 언제 어떤 책을 읽을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유 속에서 독자의 관심과 책의 주제는 맞아떨어지고, 그것이 동력이 되어 지력이 높아진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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