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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Jan 10. 2021

‘인형의 집’의 노라와 ‘귀신의 집’에 유폐된 부인들

영화 〈홍등〉과 책 〈노신 선집〉


1911년 10월 10일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청나라가 망하고 손문을 임시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건설되었다. 청나라의 몰락은 사실상 중국 봉건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장예모 감독의 〈홍등〉은 봉건사회를 고발한 작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운 집의 딸 송련(공리 분)은 계모의 강요에 못 이겨 뼈대 있는 부잣집 진나리 댁 넷째 첩으로 들어간다. 그 가문에는 매일 밤 주인이 선택한 부인의 처소에 홍등을 밝히는 가풍이 있다. 거대한 저택에는 이미 초로의 노파가 된 첫째 부인, 보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뒤로는 항상 다른 부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둘째 부인, 가수 출신으로 집안 주치의와 내연의 관계를 갖고 있는 셋째 부인이 있다. 송련은 다른 부인들과 경쟁하며 매일 밤 문 앞에서 서서 홍등이 자신 앞에 놓여지길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다. 아무리 생활이 풍요롭더라도 그것은 창녀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송련은 집안에서 선대先代의 부인들이 자살했다는 작은 방을 발견한다. 그 후, 송련은 봉건적인 유습으로 가득 찬 이 집이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귀신이 사는 집”이라고 느낀다. 부인들끼리의 첨예화되는 질투와 모략 속에서 송련의 몸종이 벌을 받아 죽고, 주치의와의 내연관계가 들통난 셋째 부인은 작은 방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그 작은 방의 용도를 알게 된 송련은 미쳐버리고, 진나리는 다섯째의 어린 첩을 다시 얻는다. 

감독은 고의적으로 시종일관 진나리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노예화시키는 권력을 추상화시킨다. 진나리는 보이지 않는 봉건체제를 상징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집안의 오랜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집안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체제를 공격하는 대신 생존과 이익을 위해 진나리의 사랑을 얻으려고 경쟁하며 서로를 물어뜯는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은 중국의 봉건적 관습을 섬세하게 비판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라는 처음에는 소위 행복한 가정에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이 남편의 인형에 불과하고, 아이들 역시 자신의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집을 나갑니다.” 그는 한 인간이 사회적 시스템에 저항하기란 물고기가 물에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집을 나간 노라에게 허락된 길은 타락하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사회가 다른 길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신은 “학대받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며느리를 학대 한다”며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분되지 않는 봉건적 현실을 개탄한 바 있다. 

노신은 여성들이 봉건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러려면 우선 여성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것은 또다른 고통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다음의 글은 그 비유로 읽힐 수 있다. “가령 말이야. 쇠로 만든 방이 있다 치자구.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는 조금도 느끼지 않지.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있는 사람 몇 명을 깨운다면 말이야. 그 불행한 소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게 될 텐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어?” 

봉건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먼 훗날 후손들은 우리가 또 다른 굴레 속에서 서로 다투며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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