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맛공방 Jan 15. 2021

독학의 힘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다.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그런데 분석과 종합은 독학,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볼 때 배양된다. 그것을 교사가 미리 가르쳐주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교사가 알려주는 꼴이 된다. 지력은 학생들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씨름할 때 높아지는데, 교사의 가르침이 너무 많으면 그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된다.


학력만큼 지력이 발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중심의 교육제도에 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고 믿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시험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있다. 이론적으로 시험은 교육 내용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테스트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로 변질된 지 오래다. 평가 중심의 교육 시스템 속에서 교사와 학부모, 학교, 학생의 관심은 시험 점수에만 집중된다. 교육도 내용의 이해나 분석과는 상관없이 시험을 잘 치르는 법, 정답을 잘 추측하는 법에 집중된다. 이러한 평가 중심의 교육 때문에 학력이 높아도 좀처럼 지력이 높아지지 않는다.


제도 교육의 내용도 문제다. 역사적으로 국가 주도의 근대적 교육의 기원은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목적은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은 공립학교, 개인 학교, 홈스쿨링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키며 교육을 국가가 독점했다. 의무교육의 목표는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 ‘부모 없는 사회(학교)’를 구성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근대 교육 자체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도 교육이 목표하는 것은 여러 지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질서로 통합하는 지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처방하는 특정 기호와 정보를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도 교육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것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비판적 사유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 같은 교재를 통해 가르친다. 문제는 이 교재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교재에는 많은 지식들이 무미건조하게 ‘교양의 차원’에서 개괄되어 있을 뿐이다. 교재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의 심각성과 진지함, 절박함이 소거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의 뿌리인 ‘현실적 문제의식’과 ‘윤리적 호소’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위나 학점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될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알아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선생 없이 무언가를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듣고, 관찰하고, 기억하고, 반복하고,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안 것을 연관시켜보고, 틀리면 고쳐나가는 과정을 통해 말을 배워 나간다. 탐구는 인류의 속성이다. 모든 사람은 이에 기반을 두고 모르는 것을 알아 나갈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쓴 『무지한 스승』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무지한 스승’도 얼마든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유식한 스승은 제자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권위로 자신의 생각을 제자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예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무지하면 그럴 염려가 없다. 오히려 무지한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지능을 십분 활용하도록 채찍질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제자의 지력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조제프 자코토(‘무지한 스승’을 자처하는 책 속의 주요 인물)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들고 무대에 들어선다. “붙들고 읽으시오.” 그가 빈자에게 말한다. “나는 읽을 줄 모르오.” 빈자가 답한다. “책에 쓰인 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소?” “자,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겠소. 그 책의 첫 문장이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가 떠난 뒤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따라 하시오.” “칼립소는, 칼립소는 못했다…….” “단어들이 거기 적혀 있소. 아무것도 못 알아보겠소? 내가 당신에게 말한 첫 단어는 칼립소요. 종이 위에 적힌 첫 단어가 그거 아니겠소? 그것을 잘 보시오. 당신이 많은 단어들 중 그것을 구별하게 될 때까지 말이오. …… 거기에서 O와 L을 알아볼 수 있겠소? 철물공이었던 내 학생 하나는 O를 동그라미라고 부르고, L을 직각자라고 불렀소. 당신이 모르는 대상이나 장소의 형태를 묘사할 때처럼 각각의 문장의 형태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보시오. 못하겠다고는 마시오. 당신은 볼 줄 알고, 말할 줄 알고, 보여줄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잖소. 무엇이 더 필요하오? 보고, 또 보고, 말하고, 또 말하기 위해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오. …… 당신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오? 아니면 당신은 몸뚱이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른바 ‘지성인’들은 좋은 학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많이 배웠기 때문에 지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학벌 좋은 사람들 중에서도 지성인이 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독학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십분 양보해서 배우는 것의 효율성을 인정한다 해도, 지성적 존재로 살고 싶다면 배움이 독학보다 큰 비중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졸저 <인문내공>에서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님, 쉬는 시간에는 뭐 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