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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Jan 17. 2021

쉽고 재미있는 책만 읽으려 하지 말라

마음만을 즐겁게 하는 평범한 책들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따라서 의심할 바 없이 정신을 살찌우는 책을 읽어야 한다.

―세네카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책을 나보다 훨씬 많이 읽었었다. 내가 한 달에 2-3권 읽을 때 그 친구는 적어도 4-5권은 읽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동안 열성적으로 책을 읽던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 책을 읽지 않으니,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왜 요즘에는 책을 읽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이제 책 읽는 재미가 없어. 나이가 들어가니까 세상사에 대해 시큰둥해져서 그런가.”

단순히 나이가 들어가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와 얘기하던 끝에 하나의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그가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은 주로 베스트셀러와 대중서로 쉬운 책들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랬다. 처음에는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재미에 빠져 읽고, 날이 갈수록 무서운 속도로 서재에 쌓이는 책들을 보면서 ‘내가 벌써 책을 이만큼이나 읽었구나’하며 뿌듯해했단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책이 그 책 같고, 안 읽은 책도 이미 그 내용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독서에 대한 욕구가 점차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느낌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책을 읽어도 자신이 좀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 있는 사람이 독서에 대한 열정이 지속될 리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책의 수준을 높여 더 어렵고 두꺼운 책에 도전해보라고 권했다. 나의 조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야. 쉬운 책에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손에 잘 안 잡히더라구.”

나는 경제경영 대중서를 주로 보아온 그에게 조금 읽기 까다로운 인문서 몇 권을 추천해주었다. 나는 빨리 읽으려 하지 말고, 시간에 관계없이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정독할 것을 권했다. 나는 힘들더라도 책의 수준을 높이면 독서에 대한 열정도 다시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나의 권유로 손에 든 책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이었다. 재미없어 할지도 모르겠다는 내 우려와는 달리, 그는 결국 600페이지 짜리 2권으로 이루어진 인문서를 독파했다.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지만, 읽다보니 이런 책도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다. 그는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그는 그 동안 적지 않은 책들을 읽은 것 같았다. 그것도 수준이 있는 책으로. 그는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본격 인문서를 읽어버릇 하니까, 그 전에 봤던 책들을 들춰보니 그 내용이 조금 허접해 보이더라.” 

그는 다시 독서의 즐거움을 찾은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일취월장하는 자신의 지적 수준을 실감하면서 책에 대해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쉬운 책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쉬운 책부터 읽어야 하고, 무리해서 어려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독서 습관도 생기고 지적 토대가 생겼는 데도 계속 쉬운 책만 읽는 사람은, 결코 고급독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독서에 대한 열정도 유지할 수가 없다. 그것은 힘들지 않은 맨손체조만 해서는 좀처럼 근력이 붙지 않는 것과 같다. 

내 경험에 따르면 독서의 수준은 조금씩 향상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도약하기도 한다. 그런 도약은 자신의 힘에 부치는 책을 뚝심 있게 읽어냈을 때 이루어진다. 아마 열정적인 독서가라면 그런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눈 높이에 맞는 책을 읽되, 끊임없이 보다 어려운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아는 소설을 쓰는 한 선배는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 장 혹은 두 장씩 읽어 세 달만에 결국 다 읽었는데, 다 읽고 나자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가슴에서 뜨겁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선배의 노력이 헛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어찌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려운 책을 힘겹게 읽고, 문득 세계를 이전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눈을 가지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들다. 독서에 대한 권태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혹시 쉬운 책만 반복적으로 읽은 데에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졸저 <책 읽는 책>에서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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