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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Jan 26. 2021

내가 알아야 할 모든 악은 학교에서 배웠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비친 유신 시대의 교육 현실

얼마 전 종방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연예인의 어릴 적 학교 친구들을 찾아주는 것이 있었다. 연예인과 그 친구들이 나와서 학창시절의 추억담을 즐겁게만 이야기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저것이 진심일까?’하고 의심하곤 했었다. 왜냐하면 나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은 꽤 끔찍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학교생활은 일상적으로 학생들을 몽둥이로 패던 선생들,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 교사들의 방조 속에 같은 학우를 때리고 벌주던 선도부들, 베트남전에서 사람 죽인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교련 선생, 양복점을 하던 아버지가 담임이 바뀔 때마다 양복을 촌지로 바친 것 등이었다. 누군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악은 학교에서 배웠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하이틴 로맨스가 스토리의 중심을 이루기는 하지만, 박정희 유신 말기 어두운 교육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역사물로도 손색이 없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학교는 병영과 같다. 학교는 힘의 논리와 폭력이 난무하는 무림(武林)의 세계다. 교장차가 교문으로 진입하면 교련 선생이나 학생들 모두 “충성!”하고 거수경례를 한다. 학교는 교장에서부터 학생들까지 서열화되어 있다. 학생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출신성분, 그리고 주먹이다. 

교육의 목적은 흔히 ‘민주시민의 양성’ 혹은 ‘인격도야’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 그려진 교육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윤리 선생은 “우리 헌정사는 서구 민주주의의 악습이 되풀이 되어왔고 이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10월 유신’의 출발점”이라며 군사독재자의 영구집권 야욕을 찬양한다. 그리고 수업 태도가 불량한 학생을 무차별 폭행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되는 거야!” 영어 선생은 명사의 5가지 종류, ‘고’유명사, ‘추’상명사, ‘보’통명사, ‘집’합명사, ‘물’질명사의 앞글자만 따서 음담패설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물로만 보도록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학교였다. 

학교는 군사독재의 정당성을 가르쳤고 힘없고 가난한 학생들을 “잉여인간” 취급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적 사고를 짓밟았다. 폭력적인 학교생활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도 힘을 갖는 것이다. 그런 생존의 논리를 잘 체현하고 있는 학교의 주먹짱 우식이(이정진 분)는 이렇게 말한다. “쪽 팔리면(주먹으로 지면) 학교생활 바로 쫑이야.”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소룡의 절권도를 연마하여 학생들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선도부 패거리들을 흠씬 패준 주인공 현수(권상우 분)는 선도부를 비호해온 교사들을 향해 이렇게 절규한다. “대한민국 학교 다 X이라 그래!!” 

군사독재 시절은 끝났다. 윤리 선생은 독재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일제 시대의 잔재로 ‘학생 위의 학생’인 선도부들의 패악도 예전 같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가 민주주의와 인격도야를 가르치고, 그와 배리되지 않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학교는 ‘정신과 인격의 도장(道場)’이 아니라 병든 사회의 축소판에 가깝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현대의 학교는 모범생 못지않게 불량학생도 함께 양성하는 시스템이다. 불량학생들은 교육 시스템 외적 존재가 아니라 내적 존재라는 말이다. 스스로 양성해놓고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된다”는 유신체제의 역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폭력의 논리가 지배하는 ‘무림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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