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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Jan 22. 2021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리고 그리움

영화 〈오래된 정원〉과 책 〈입 속의 검은 잎〉

우리나라 국문과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김소월? 김수영? 아니다.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딱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스물아홉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기형도다. 그의 죽음은 인상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보통 액션영화와 에로영화를 동시상영하던 종로의 삼류영화관에서 심야영화를 보다 죽었다. 사인은 뇌졸중. 

기형도의 시의 생명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우울한 정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도 건드려보면 슬픈 소리가 난다”는 나스메 소세키의 말처럼 현대인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우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형도의 우울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대학을 다니고 시를 썼던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광주항쟁’이 만들어낸 정신적 부채는 컸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가장 일상적인 일들, 공부를 하고, 연애를 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사치였다. 용기 없는 자는 총부리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용기 있는 자는 저항하다 죽었으며, 방관자는 양심의 가책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형도는 폭력적인 것하고는 천성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그는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도 광주가 만들어낸 정신적 부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의 경우는 감성적인 천성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가 시에서 묘사한 당시의 대학 풍경은 한편의 묵시록이었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 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대학시절」 중에서)

오늘날에는 좀처럼 시가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대는 시의 시대였다. 공포정치는 아니러니하게도 시적 로망을 만들어냈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은 내밀하고 은유적인 시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격정을 토로했다. 강렬한 시적 페이소스가 사람들의 정신을 자극하던 시대였다. 황석영의 동명소설을 임상수 감독이 영화화한 〈오래된 정원〉의 주인공 오현우(지진희 분)도 시인이자 운동가다. 수배를 받고 시골 미술교사 한윤희(염정아 분)의 집에서 도피생활을 하게 된 그는 이런 자작시를 읊어준다. “바람에 불려 대기가 젖는다 / 내가 봄비라고 이름짓는다 / 봄비 / 그러나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짧은 시 한편이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한 시대였다. 둘은 연인이 된다. 

영화는 80년대 젊은이들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 봄 소풍을 함께 가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때 광주에서 당신은 뭐했어?” 오현우가 답한다. “도망쳤지. 일찌감치.” 오현우의 표정이 갑자기 감정에 복받쳐 일그러진다. 불길한 표정을 읽은 그녀. “화나? 피가 끓어?” 오현우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답한다. “실은 부끄러워.” 다른 장면. 감옥에서 출소한 후, 오현우는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딸에게 자신의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은 시대였거든. 바보같이…….” 

그랬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바보들이 많은 시대였다. 적어도 80년대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부유층 출신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부를 부끄러워했으며, 방관자들 역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다. 불행한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한 시대였다. 무언의 거대한 정서적 공동체가 존재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공동체였는지 모르겠다. 그 때문에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체포된 오현우가 감옥에서 17년을 보낸 후, 나와서 본 세상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는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고, 사랑하는 한윤희는 자신의 딸을 남기고 먼저 암으로 세상을 떴다. 한때 동지였던 사람들은 망가졌다. 과거의 운동경력을 팔아 한 자리씩 차지한 사람들은 거들먹거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사기꾼․바람둥이․알콜 중독자․정신병자가 되어 서로 시기하고, 모욕하고, 자학한다. 옛날의 투사들은 길을 잃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은 처연하고, 그만큼 비루했다. 

‘오래된 정원’은 무릉도원처럼 이상향을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노력했고,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상향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과제는 늘 변한다. 칼 포퍼는 말했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그것은 아마 인간사회의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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