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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경 Oct 01. 2019

30분 정성이 꼭 필요한 맛, 도토리묵




도토리묵에 대한 첫 추억


초등학교 시절 엄마와 같이 시장에 가곤 했습니다. 잘 알지는 못했지만 엄마 손을 꼭 잡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찬거리를 구경했지요. 그러다 엄마가 집에 가서 같이 먹자고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 주시는 날이면 어린 마음에 엄청 신이 났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멍게와 같은 해산물부터 시작해 순대, 튀김과 같은 분식류, 호빵에 이르기까지 엄마와 같이 쌓은 시장 먹거리 추억은 참 다양했습니다. 저녁 반찬거리로 도토리묵을 산 그 날은 시장을 다녀온 후 간식으로 도토리묵을 맛보는 날입니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재빨리 참기름 간장 양념을 만든 후 도토리묵을 맛보게 해 주셨습니다.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을 젓가락으로 잘 집지 못하면 엄마는 손으로 도토리묵을 간장에 꼭 찍은 후 제 입안에 넣어 주신곤 했지요. 그렇게 도토리묵이란 음식이 제 기억 속으로 들어온 첫 순간입니다.







도토리묵을 직접 쒀 먹기 시작한 순간


지금은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맘만 먹으면 국산 도토리 묵가루를 사다가 집에서 만들기만 하면 되지만  부모님이 어린 시절에는 도토리묵은 손이 많이 가서 먹기 힘든 귀한 음식이었답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채집하고, 잘 손질한 도토리를 절구에 빻고 그 가루를 물에 담가 전분을 우려낸 후 다시 햇빛에 말려가면서 묵가루를 만드는 모든 과정은 지금 생활방식으론 보통 가정집에서 감히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어려운 일입니다.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도토리묵을 사 먹던 우리 집에서 도토리묵을 직접 쑤어 먹기 시작한 건 1997년부터입니다. 강원도 양구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맞이한 첫 번째 어버이날, 부대에서 부모님께 보내드릴 선물을 고르라며 각종 상품 안내가 담긴 책자를 나눠주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르면 어버이날 음악이 나오는 카네이션 조화와 양구 특산물로 소개된 도토리묵 가루를 사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한참 후 휴가 때 집에 오니 엄마가 도토리묵을 쒀 주셨습니다. 제가 보낸 도토리묵 가루로 직접 쑨 거라며 맛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곤 시장에서 만들어진 도토리묵을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면서 앞으로는 직접 도토리묵 가루를 사서 묵을 쑤어 먹겠다고 하셨지요. 그 이후부터 엄마는 매년 가을 도토리묵 가루 햇상품이 나오면 잊지 않고 구매를 한 후 도토리묵을 쑤어 주셨습니다.





도토리묵을 쑤며 삶을 배우는 순간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엄마가 도토리묵을 쑤면서 잘 지켜보라고 합니다. 마냥 어렵고 복잡할 줄 알았던 도토리묵이었는데 엄마가 가르쳐 준 몇 가지 원칙만 지키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더군요.

1) 도토리묵 가루와 물 비율은 1:6

2) 묵을 쑬 때는 꼭 나무주걱만 사용해야 하고 한 방향으로만 젓기

3) 불에 올린 후 최소 30분은 쑤어야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만큼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이 만들어짐

4) 다 쑨 도토리묵을 그룻에 붓고 5~6시간 식히면서 도토리묵 완성하기


그러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 맞이하는 추석 때 도토리묵을 만들면서 꾀를 부리다 큰 코 다쳤습니다. 엄마 방식 하나하나 그대로 따라 하다가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30분을 다 채우지 않고 불을 껐습니다. 그릇에 묵 쑨 걸 붓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묵이 단단해지지 않더군요. 너무 흐물흐물해서 도저히 밥상에 올릴 수 없었기에 아깝지만 버리고 말았지요. 딱 5분 차이였습니다. 마지막 5분을 참지 못하고 묵을 덜 쑨 탓에 그날 추석은 엄마가 안 계신 티를 내고 말았지요. 도토리묵을 쑤는 데도 사자가 토끼를 잡듯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 기울어야 하는 걸 배웠답니다.


지금은 더 이상 잔꾀를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엄마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탱글탱글한 식감이 잘 살아있는 도토리묵을 완성하고 나면 마냥 기분이 좋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토리묵을 먹으며 레퍼토리처럼 주고받던 대화들이 떠오르네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리운 마음은 쉽게 달래지지 않네요.  


그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어떻게 도토리묵을 쑤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도토리 열매를 물에다 넣으면 전분가루가 나오고, 전분가루를 물에 섞은 후 끓이면 도토리묵이 된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을까? 너무 궁금하지 않니?

 


30분 정성이 깃든 맛, 도토리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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