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괴롭힐까.

아힘사와 자비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습

by 지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왜 나 자신에게 유독 차가울까. 누군가가 실수하면 “괜찮아, 누구나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면서, 내가 실수했을 땐 “넌 왜 늘 이래?”라고 끝없이 몰아세운다.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말을 건네면서, 정작 내 마음에는 가장 가혹한 말들이 메아리친다. 왜일까. 왜 우리는 유난히 나 자신에게만 그렇게 차갑고 잔인할까?





1. 폭력은 타인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요가의 가장 첫 번째 윤리 원칙은 아힘사(Ahiṁsā), 즉 비폭력(non-violence)이다. 이 말은 단순히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힘사(hiṁsā)’가 해침, 상해, 폭력이라는 뜻이고, 거기에 부정어 ‘아(a-)’가 붙어 “어떤 해로움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힘사(Ahiṁsā)’라는 개념은 단지 요가의 원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기원전 800년에서 500년경에 형성된 우파니샤드(Upaniṣad) 문헌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인도에서는 의식 중심의 브라만교적 세계관에서 내면 중심의 철학적 사유로 전환이 이루어졌고, ‘자기(ātman)’와 ‘우주적 실재(brahman)’의 일체성을 통해 고요함과 비폭력의 내면화가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이후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아힘사는 점차 모든 생명에 대한 태도이자, 깨달음을 위한 필수 조건인 다르마(dharma)로 정립되었다.


자이나교는 아힘사를 가장 철저하고 극단적인 형태로 실천했다. 단 한 생명도 해치지 않기 위해 땅을 쓸고 걷고, 물속에 사는 미생물조차 다치지 않게 끓은 물을 마신다. 그들에게 아힘사는 모든 존재와 나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의 실천이자,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불교에서는 아힘사가 자비(karuṇā)와 자애(mettā)의 실천으로 전환된다. 살생하지 않음은 물론,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확장되며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향하는 정신적 비폭력으로 구현된다.


힌두교(특히 바가바드 기타와 요가 수트라 전통)에서는 아힘사가 단지 외적인 윤리 규범이 아니라, 수행자의 의식 상태,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비폭력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곧, 생각, 말, 행동, 감정, 반응 모든 것에서 일으키는 진동조차 해롭지 않게 하는 삶을 뜻한다.


요가는 이 정신을 이어받아, 비폭력을 단지 살생 금지도덕률의 차원이 아닌, 수련자의 내면에서부터 실천되는 존재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아힘사는 단지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를 고요하게 만들어가는 윤리다.


《요가 수트라》에서 아힘사는 팔리팔(Pātañjala Yoga) 수행의 첫 걸음으로 명시되어 있다. “아힘사는 요가 수행자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끝까지 필요한 원칙이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깊다. 상처 주는 마음으로는 어떤 진짜 변화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힘사는 종종 ‘살생하지 않기’ 같은 행동 윤리로 축소되지만, 요가는 더 미세한 영역을 가리킨다. 타인을 향해 던지는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상대의 실수를 붙잡고 판단하며 우월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심지어 그 판단과 날카로움이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하는데, 그 폭력은 더욱 교묘하고 깊어진다. “왜 이렇게 못하니?” “넌 늘 이 모양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넌 대체 왜 그래?” 이런 말들이 조용히, 그러나 반복적으로 나를 해친다. 겉으로는 멀쩡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속에서는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내면의 손톱질이 멈추지 않는다.


요가는 말한다. “비폭력이란, 그저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힘사는 단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나 자신에게 향할 때’ 진정한 실천이 시작된다.


자신에게 하는 말투, 스스로를 대하는 시선, 실수를 바라보는 자세, 감정을 다루는 방식. 그 모든 것이 아힘사의 여부를 결정한다. 우리는 종종 외부의 폭력에는 민감하면서,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폭력에는 무감각하다. 하지만 매일같이 스스로를 다그치고, 비난하고, 끝없이 채찍질하면서 ‘더 나아지는 나’를 만들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야말로 지속적인 내면의 폭력일 수 있다. 요가는 말한다.


“당신이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을 덜 해치는 쪽을 선택하라.”





2. 자기비판은 어디서 올까.


— 비교의 심리, SNS의 그림자

자기비판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어릴 적 우리는 비교를 통해 사회를 배웠다. “누구는 벌써 글을 읽는데, 넌 아직이니?”, “네 동생은 이렇게 했는데, 넌 왜 못 하니?” 이런 말들은 단지 교육적 훈계가 아니라, ‘나는 뭔가 부족하다’는 인식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릴 적보다 더 거세고 즉각적인 비교의 파도 속에 있다. 그 중심에는 SNS가 있다.


SNS는 비교의 ‘속도’와 ‘밀도’를 전례 없이 바꾸어놓았다. 누군가의 성공, 성취, 사랑, 외모, 루틴, 평온한 아침까지. 그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알고리즘과 스크롤을 타고 우리에게 도달한다. 살면서 한번도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의 삶까지 굳이, 시간을 들여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들과 자신의 현재를 겹쳐본다. 카메라 앞의 누군가와, 눈앞의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평가한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꾸준하지 못할까?” “나는 왜 늘 게으른 것 같지?” “나는 왜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이 질문들은 사실 자기비판이 아니라, 비교에서 비롯된 자기불안이다.


SNS는 ‘타인의 삶’이 아니라 ‘타인이 보여주고 싶은 순간’만을 집약한 기록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최적화된 이미지’를 나의 ‘가장 나약한 순간’과 비교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린다.


문제는, 이 비교가 일어나는 방식이 너무 무의식적이라는 점이다. 의식적으로는 “나와 남은 달라”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은 이미 스스로를 열등감으로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자기비난의 말투로 바뀐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할까.” “나는 항상 이래.” “나는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아.” 이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결국 자기비판은 감정이 아니라 정체성처럼 굳어진다.


요가는 이런 비교의 흐름을 어떻게 바라볼까? 요가는 말한다. “진짜 나와 마주하는 순간, 비교는 멈춘다.” 비교는 ‘바깥’을 보게 만들고, 요가는 ‘안’을 보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를 괴롭히는 가장 큰 이유는 남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가의 길은 다르다. 요가는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지금 이 모습은 얼마나 귀한가?”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감각을 기억할 수 있는가?”


비교는 피할 수 없지만, 그 비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마음의 힘은 키울 수 있다. 요가는 그 힘을 자각에서 찾는다. 비교의 파도 속에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그것이 아힘사의 시작이자, 요가가 가르치는 존재의 존엄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3. 자비는 밖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 불교 자애명상과 요가 아힘사가 만나는 자리

자기비난은 혼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사회속에서 비롯된 비교와 기대, 속도와 기준이라는 틀 안에서 서서히 내면화된 목소리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더 잘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그 애씀의 방향이 바깥을 향한 인정에만 머물면, 결국 우리는 ‘더 나아지려는 나’를 만들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꾸만 미워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더 '나은 나'라는 건 사회가 원하고, 필요한 모습의 '나' 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요가는 말한다. “비폭력은 타인을 향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 그 말은 자신에게 상처 주는 말을 멈추고, 완벽하지 않은 나를 품고, 오늘을 버텨낸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같은 가르침을 전한다. 자비(慈悲)는 보통 타인을 향한 사랑처럼 들리지만, 그 수행의 시작은 언제나 ‘나 자신’을 향한 자비다. 자애명상(mettā bhāvanā)은 모든 생명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수련이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나 자신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 자신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문장은 처음에는 너무너무 어색하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당연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그런 말을 건넨 적이,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래서 상당히 난감하고, 힘든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스스로를 얼마나 돌보아 주었는지,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과 상냥함, 배려만큼 스스로를 챙긴 적이 얼마나 되는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자주, 가장 깊게 나를 괴롭혀온 존재는 사실 내 안의 ‘나’였는지도 모른다.


불교는 말한다.

“타인을 향한 연민은, 자신을 향한 자비에서 시작된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 도우려면 먼저 자신의 괴로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 마음이 없으면, 우리가 베푸는 친절조차도 얇고 쉽게 무너진다. 요가의 아힘사 역시 같은 자리에 닿아 있다. 아힘사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해가 되는 말을 멈추고, 나를 다그치지 않고, 나의 아픔에 부드럽게 손을 얹는 것이다.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하기. 실패한 나를 야단치지 않고 바라보기. 비교 속에서 힘겨웠던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기. 그 모든 행위는 요가의 아힘사이자, 불교의 자애 수행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채찍이 아니라 연민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오늘 하루 무언가에 실망했다면, 자꾸만 자신을 작게 느꼈다면, 이렇게 조용히 말해보자.


“나는 지금 힘들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이 평화롭기를 바란다.”


이 짧은 말이

스스로를 회복하는 시작이자,

진짜 수련이 머무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4. 요가 수련은 자기 수용의 연습이다.


매트 위에 설 때,

일상을 살아낼 때,

우리는 자주 흔들리고 실수한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자세가 무너지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마음이 요동치고, 스스로에게 모진 말까지 내뱉는다.

하지만 요가는 그 순간조차도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연습이라 말한다.


잘하려는 마음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수련이다.

요가에서의 성장은 늘 완벽함이 아니라,

수용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수련은 자기 연민의 실천이며,

아힘사는 그 실천의 바탕이다.


매트 위에서 못난 모습이란 없다.

삶 속에서 못난 모습이란 없다.



더 이상 나를 해치지 않기로.


요가는 단지 몸을 단련하는 수련이 아니다.

그건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바꾸는 수련이며,

먼저 내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비교, 비난의 패턴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오늘 하루,

혹시 내가 나에게 너무 많은 비판을 쏟아냈다면

이렇게 조용히 속삭여 보자.


“나는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나는 나 자신이 평화롭기를 바란다.”

“나는 더 이상 나를 해치지 않기로 했다.”


그 다짐 하나가,

요가가 말하는 첫 번째 윤리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윤리는,

나를 향한 따뜻한 시선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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