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아닌 방황.
방황하는 당신, 매우 정상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만큼이나 주체적으로 살아왔을까.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나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학교 시스템만 따르면 되는 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원하는 정답만 찾는 생활을 했었고, 그것에 길들여졌다. 그러다 덜컥 사회에 나와야 했고, 본인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책임을 져야만 하는 환경에 닥치게 됐었다. 조금 큰 어항 속에서만 살다가 갑자기 바다로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바다에서의 생활은 어항 속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자유로운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곳은 정말 자유롭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때로는 너무나도 삭막한 사막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 곳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사회 속에 급작스럽게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리고 난 해초가 되어버린 물고기처럼 날 휘어 감는 해류에 휩쓸려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몸을 나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다 운전자보다 탑승자에게 더 자주 나타나는 멀미 현상이 나타났고, 문득 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회사 선배들처럼 그곳에 너무 익숙해져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것 같았고, 아예 벗어나고 싶은 마음마저 귀찮게 여겨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해류의 움직임이 원래 나의 의지인 것처럼 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시도해 보기 위해 퇴사를 했다.
나는 가장 먼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한국사 공부를 했다. 누군가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나는 정말 순수히 배우고,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내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일을 하게 되던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책으로, 강연으로 혼자서 마음공부를 한다.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일을 다시 시작하며 꿈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번아웃이 찾아왔고, 공허감과 무기력감이 나를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시기가 왔다. 나는 이를 극복해 보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순례길로 떠났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경험과 도전을 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실패와 소소한 성공만이 남았다. 나에게 이렇다 할 결과물이 사실상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실은 나를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과연 나의 이러한 시간들은 대부분 방황뿐이었으니 무의미한 것일까?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고독의 시간을 보내며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만한 노력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 기간 동안 이런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구나, 내가 존재하는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책들을 읽고, 공부하고 배우며,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돌아다니며, 어떤 때에는 허공에 붕 뜬 기분으로 있기도 했고, 운명 같은 우연의 연속이 계속되는 여행 속에서, 기적 같은 순례길에서,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첫 해외여행지에서, 내 골방에서, 나만의 생각을 키워가고, 스스로 결정을 하며, 비록 그 순간의 선택으로 고통받았을지라도, 오로지 나라는 사람으로 존재했던 그 수많은 순간들에서 행복했다.
20대의 방황은 당연하다. 30대, 그 이후의 방황도 당연하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정해진 목적지는 단 하나뿐이다. 죽음. 그뿐이다. 최종 목적지인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끝없는 방황 속에서 우리의 일생을 보낸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닌지, 허황된 꿈을 좇는 것은 아닌지,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는지 걱정하고 두려움에 떨고, 방황하는 것에 당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누구나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다. 방황 그 자체가 인생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침반처럼 단번에 북쪽을 가리키고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바위도 그 속을 아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끊임없이 떨림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방황은 너무나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