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폭으로 걷기
'작학관보' - '雀學鸛步'
참새가 황새의 걸음을 배운다는 뜻으로, 자기의 역량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남을 모방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참새가 황새 쫒아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로 흔히 쓰이기도 한다.
순례길을 걷기 전 나는 미지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기 위해 사전조사를 했다.
아무래도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순례길 일정이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순례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스케줄표를 살펴봤다.
1일 차부터 34일 차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몇 km를 걸었고, 몇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한 정보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여러 사람의 정리된 스케줄을 보니 평균적으로 걷는 거리와 일수가 보였다.
나는 여러 스케줄 중 가장 평균적이라고 생각한 누군가의 스케줄대로 내 일정을 미리 계획했다.
그곳에 도착해 초반 며칠은 예정대로 잘 걸었고, 심지어 남들보다 더 빨리 잘 걸었다.
약간 힘들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스케줄을 소화한 나는 미리 계획한 일정대로 끝가지 잘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계획한 일정(타인의)에 맞추기 위해 순례길을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예정됐던 계획이 조금씩 틀어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절대 걸을 리 없는 거리를 쉬지 않고 계속해서 걷다 보니 피로도가 점점 쌓여갔고,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이 점차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체 일정을 계획해두었고,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사전조사 때 누군가의 예산을 참고해서 정해놓았던 지출이 생각보다 많이 세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례길 초반에 느꼈던 여유를 점점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정된 일정을 소화해내기 위해 다음날, 그다음 날을 계속해서 걸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며칠을 더 걷다 보니 마치 걷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공장에서 미리 세팅해 놓은 물량을 꼭 찍어내야만 하는 기계처럼 일하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기계는 아프더라도 부품을 교체해버리면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나는 기계가 아니었다. 결국 족저근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 마을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몸이 편하니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착한 마을에서 예정대로라면 이틀만 쉬어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회복이 되지 않았고 3일을 쉬게 되었다. 나는 쉬는 동안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이켜봤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분명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써왔던 일기를 들춰봐야만 떠오르는 기억들도 있었다. 다른 이가 정해놓은 스케줄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황새 쫒는 참새의 신세가 되었고, 결국 몸이 망가져버렸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일정에 맞춰 목적지에만 가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걸어가다가 소중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또 너무나 속상했다. 그동안 도대체 무얼 위해서 그토록 고생만 하며 걸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을 보며 꿈을 이루겠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남은 게 없다는 느낌과 회의감이 들어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서조차 똑같은 모습을 반복했다는 사실에 상실감이 들었다.
나는 이제 나의 속도를 찾고, 나만의 보폭으로 이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후의 순례길에서는 나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던 그동안 놓쳤을 수많은 행복들을 발견하며 전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