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루팡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 혁명을 역사상 최대 사기라고 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책에서 밝힌 대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노동의 우상화를 지적하고 싶다. 농업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일상에서 노동을 결단코 피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수렵 채집 생활 때 보다야 생존율도 높아졌고, 수명도 늘었겠지만, 농경-가축을 시작하면서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인간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작(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단일 농작을 하는)을 시작했다. 또 순하고 기르기 쉬우면서 맛있는 동물 일부를 추려서 가축을 시작했다. 그 결과 해가 떠있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경작지를 일궈야 했다. 가축을 키워야 했다. 이것은 생각보다 몹시 피로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전에는 없던 질병들에 걸려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그 대가로 잉여 자원을 만들 수 있었다. ‘잉여 자원’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잉여’는 곧 ‘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농업 혁명을 시작하면서 ‘노동=생존’을 넘어 ‘노동=부’라는 새로운 개념을 획득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실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 성실성이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는 신념이 꽤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바쁜 척하며 살기 위해 실제로 바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말한 ‘잉여 자원’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잉여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은 결국 일부 기업가이자 자본가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성장과 경쟁이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성실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은 그들의 뜻을 기꺼이 따라 거의 먹고 살기만을 위해 투입된다. 이렇게 자본주의(자유경쟁)가 굴러간다.
그렇게 인간 문명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함이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공감할만한 명분으로 21세기에 다다랐다. 우리가 얻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나는 대부분 스마트폰 알람을 듣고 일어난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고, 밥솥에서 밥을 퍼서 아침을 먹는다. 화장실이라는 곳에서는 겨울이지만 따뜻한 물로 씻고, 피부를 위해 로션과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다.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마주하며 자전거를 타고 몇 개의 신호등을 건너서 출근을 한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서 이런저런 업무를 단숨에 해치우고, 퇴근해서는 스마트 티브이로 유튜브를 본다. 요즘 자기 전에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고, 어쩌다 한 번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다.
이렇듯 과거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들을 경험하며,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래서 지금 당장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네.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단언컨대 단 한치의 망설임과 거리낌이 없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만족이란 불가능이다. 성직자도 결국 너 나은 세상과 나은 삶이라는 궁극적인 바람을 가지고 활동한다. 인간은 결국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토록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면 잘 될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현재를 사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자본주의(문명)는 성장과 경쟁이라는 두 기둥에 성실성이라는 시멘트 가루가 합쳐져서 건설됐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세울 수 있는 동력으로 불만족에서 비롯된 ‘더 나은 삶’이라는 명분을 언급했다. 일반 소시민은 말 그대로 성실하게 살면 더 나은 삶을 살 줄 알고 열심히 살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극 초반기 농경 사회에서는 그나마 고르게 배분되던 잉여 자원이 이제는 극심한 부의 양극화를 나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한 낙관적 희망을 품고 여전히 성실하게 노동을 하며 산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실한 노동은 개인의 궁극적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에 가짜 노동을 언급하며 상당수의 노동자가 공회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상당 수의 사람들이 회사에서 성실함의 탈을 쓰고 공회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회전은 제자리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엔진을 움직이며 매연만 뿜을 대로 뿜어대는 일이다. 정말 쓸모없는 일이다.
일주일에 5일 출근, 일 8시간 근무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명백하고 명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는 소리는 대부분의 헛소리일 것이다. 그렇게 공회전하는 노동을 적당한 수준으로 맞추게 되면 온갖 기계와 공장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게 되면 탄소 배출도 낮아진다. 개인의 행복 지수는 당연히 높아진다. 지난 코로나 때 수많은 공장들이 일시 정지가 됐고, 그 짧은 몇 년 동안 배출된 탄소도 줄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한 경제 침체와 일자리 상실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나 역시 그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부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정말 힘들었을까. 나는 또다시 ‘월급 루팡을 아시는지요?’에서 말한 부의 분배 문제를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도대체가 전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도 하지 않으면서 직장인들을 하염없이 굴리는 기업인들이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토록 많은 부를 축척하는 게 정말 알맞은 일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말 최선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의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떠한 ‘주의자’도 아니다. 어떤 건 옳고 어떤 건 그르다고 판단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내게 보이는 이러한 문제점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를 끄적여볼 뿐이다. 그 문제를 빤히 들여다볼 뿐이다.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연이어 겪은 우리나라는 미국의 시스템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대부분의 제도와 시스템을 따랐다. 균일한 틀에 사람들이 끼워 맞춰진 것이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 유독 드러나는 빨리빨리 문화가 덧입혀졌다. 덕분에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급성장을 이룩했고, 지금은 준선진국이자 k문화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후 위기 대응 지수가 최하위이다. 자살률은 늘 최상위다. 가짜 노동은 개인의 행복 문제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라는 거대 담론을 품고 있는 문제다. 이제 우리나라를 성장시켰던 기준과 가치를 전면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추신_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 글은 직장에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