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음으로 말하기:쁘랍다 윤, 25년의 우회로 7

7. 해방의 서사: 누가 말하고, 무엇을 내려놓는가

by 태국학연구소

7. 해방의 서사: 누가 말하고, 무엇을 내려놓는가


『Basement Moon』이 던지는 가장 급진적인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누가 말할 권리가 있는가?’


소설 속에서 작가 ‘쁘랍다’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아니면 미래의 AI ‘메리’의 입을 빌려 말하는가?

메리는 실재하는 혁명의 주체인가, 아니면 작가가 만들어 낸 고독한 환상인가?

혁명은 가능한가, 아니면 이미 실패했는가?

소설은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는다.

화자는 신뢰할 수 없고, 기억은 누락되며, 사건의 인과관계는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불확실성이야말로 핵심이다.


한 태국 비평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 질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설에는 ‘군부’, ‘쿠데타’, ‘검열’ 같은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정치 사건도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쁘랍다는 구조적으로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가"를 설계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의 윤곽을 드러내고 침묵의 형태를 가시화함으로써

거꾸로 억압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시대에 비인간—여기서는 AI—이 대신 말하게 하는 설정은

단순한 기술적 상상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포스트휴먼적 저항의 알레고리다.


여기서 우리는 쁘랍다 윤의 초기 문학 세계를 지배했던 핵심적 정서인

‘쁠롱(ปลง, 내려놓음)’의 진화를 목격한다.

과거 그의 ‘쁠롱’은 의미를 확정하지 않는 태도였다.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 것, 독자에게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 것.

그저 인물들이 느끼는 고립은 슬프지만

그들은 그 고립을 억지로 깨지 않고 그저 ‘내려놓고’ 바라보는

소극적인 수용이었다고 한다면

11년의 침묵 끝에 돌아 온 그의 ‘쁠롱’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의 장편 공백기 자체가 일종의 정치적 ‘쁠롱’으로 해석해 본다면

노골적인 분노 대신 창작의 형태를 바꾸며 시대의 비극을 견뎌낸 것이다.


그리고 『Basement Moon』에서의 ‘쁠롱’은 다른 의미를 얻는다.

단순한 포기나 체념이 아닌 해탈에 가까운 내려놓음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AI 메리의 혁명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권을 "놓아야" 비로소 성립된다.

즉, 인간 중심적인 협소한 사고를 포기하고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 자체를 내려놓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논리이다.

한 인터뷰에서 쁘랍다는 "이것은 불교가 아니라 생물학과 뇌과학의 문제" 라고 선을 그었다.

종교적 초월이 아니라 과학적 재사유로서의 해방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쁠롱’은 더 이상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태도가 된다.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

권력의 형태를 재상상하는 것이다.


결국 쁘랍다 윤에게 ‘쁠롱(ปลง)’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낡은 세계의 방식을 중단하는 용기’이다.

2000년대 초반의 포스트모던적 해체는,

2018년 『베이스먼트 문』에 이르러

인공지능과 생물학적 사유를 통해

인간이라는 감옥을 내려놓는 거대한 해방의 서사로 완성되었다.


그는 여전히 지하에서, 혹은 우주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서 무엇을 다시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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