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의 정적인 골목을 떠나 방콕의 심장부로 들어온 지 사흘째,
쑤는 이 도시가 뿜어내는 거대한 소음과 열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택시 시트의 낡은 가죽 냄새와 눅눅한 에어컨 바람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쑤는 가방 속에 든 여행 일기장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기록할 수 있는 건 '지침' 혹은 '포화 상태'라는 단어뿐일 것 같았다.
차들이 비명을 지르듯 경적을 울려대다 일제히 멈춰 섰다.
신호등에 붉은 불이 들어왔다.
90초.
그 붉은 빛은 택시 안으로 무례하게 침범해
쑤의 무릎과 손등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쑤는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그때, 정지된 차들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하얀 실루엣 하나가 일렁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이라기보다,
붉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작은 조각배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것은 아이였다.
땟자국이 역력한 교복 셔츠를 입은 아이.
쑤는 아이의 손을 보았다.
한 손에 들린 자스민 꽃다발은 싱싱했지만,
그것을 쥔 아이의 손톱 밑은 새카만 기름때로 가득했다.
그 때가 아이의 손가락 끝마다 검은 초승달을 그려놓은 것 같아,
쑤는 묘한 통증을 느꼈다.
'저 손으로 밥을 먹겠지. 저 손으로 글자를 쓰겠지.'
아이가 쑤가 탄 택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붉은 테일램프 불빛이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서 타올랐다.
쑤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자신의 피로함은 이 아이의 생존에 비하면 사치라는 죄책감이,
그리고 이 비극적인 장면에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붙여
일기를 쓰고 싶어 하는 작가적 본능이 충돌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때였다. 아이가 웃었다.
그것은 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웃음이었다.
동정을 구하는 비굴함도, 삶에 찌든 체념도 없었다.
아이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소나기를 맞은 사람처럼, 혹은 이제 막 학교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는 아이처럼 무결하게 웃어 보였다.
붉은 조명 아래서 번뜩이는 아이의 하얀 치아는 너무도 투명해서, 쑤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것은 연민보다는 차라리 분노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이 매연 속에서, 이 붉은 신호등 아래서,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내 피로를 비웃듯 웃는 거니?'
아이가 건네는 그 미소가 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가시가 되어 박혔다. 아이의 웃음은 쑤가 가진 '동정심'이라는 알량한 감정을 단번에 무력화시켰다. 쑤는 차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이의 웃음이 환하면 환할수록, 쑤의 세계는 더 어둡고 비겁하게 느껴졌다.
신호등의 숫자가 어느덧 '5'를 가리켰다. 아이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옆 차로로 사라졌다. 붉은 불빛이 사라지고 초록빛이 도로를 덮었지만, 쑤의 망막에는 여전히 아이의 검은 손톱과 그 하얀 미소가 잔상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택시는 기어가는 것조차 멈췄다.
앞차의 붉은 등이 쑤의 시야를 꽉 채웠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지만,
이 거대한 기계의 줄기는 단 몇 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쑤는 에어컨 송풍구의 방향을 뒤로 향하게 해 달라는 당부를 하고
시트 깊숙이 몸을 구겨 넣었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 허기는 이미 감각의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뱃속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보다,
방금 전 아이가 남기고 간 그 웃음의 파편이
명치 끝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하필이면 왜 교복이었을까.'
쑤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이의 손톱 밑에 박혀 있던 그 검은 기름때와
어둠 속에서도 짐작 될 꼬질한 셔츠 깃.
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미래'라는 단어와
도로 위에서 꽃을 파는 '현재'라는 단어가
아이의 몸 위에서 기괴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조리를 단번에 덮어버리던 그 환한 미소.
쑤는 자신의 가방을 꼭 쥐었다.
그 안에는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아름답게 포장해 적어온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쑤는 자신이 적어온 모든 글자가 가짜처럼 느껴졌다.
태국의 사원에서 느꼈던 평온함도,
길거리 음식의 다채로운 맛도,
그 아이의 웃음 한 번에 모두 빛을 잃었다.
차창 밖으로 다시 다른 아이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또 다른 'เด็กข้างถนน(덱캉타논/도로변 아이)'일 것이다.
하지만 쑤는 다시 창밖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다시 누군가의 '화가 날 만큼 환한 미소'와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기사님, 아직 멀었나요?"
쑤의 물음에 기사는 백미러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태국인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차이 크랍(맞아요)... 길이 너무 막히네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기다림.
그것은 쑤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배운 단어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단어가 끔찍하게 무거웠다.
쑤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망막에는 붉은 신호등의 잔상과
아이의 하얀 치아가 겹쳐져 떠다녔다.
택시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쑤는 그저 이 거대한 붉은 불빛의 소용돌이 속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착지도, 도착 시간도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손톱 밑이 새카만 아이들이 건네는 자스민 향기가
차 안의 눅눅한 공기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견뎌낼 뿐이었다.
택시는 여전히 붉은 테일램프의 파도 속에 잠겨 있었다. 쑤는 더 이상 아이를 찾으려 애쓰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눈을 감지도 않았다.
배고픔은 이제 통증이라기보다 몸 안의 가벼운 공허함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는 대신, 그저 낡은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차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위로 도로의 불빛들이 무채색의 그림자를 만들며 흘러갔다.
아이의 웃음은 더 이상 화가 나거나 가슴 아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도시의 지독한 매연이나, 습한 공기, 혹은 지리하게 반복되는 붉은 신호등처럼 방콕이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는 하나의 원소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를 말며, 또 어떤 아이는 교복을 입은 채 붉은 불빛 아래서 환한 웃음을 짓고...아니 꽃 송이를 판다.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이곳의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쑤는 창틀에 묻은 얇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살짝 훑어보았다. 아까 본 아이의 손톱 밑에 박혀 있던 그 검은 때와 닮은 빛깔이었다.
'결국 모두가 조금씩은 이 도시의 먼지를 묻힌 채 살아가는 거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뺐다.
기사는 라디오 볼륨을 낮게 줄였고,
스피커에서는 나른한 태국 가요가 흘러나왔다.
가사의 뜻은 다 알 수 없었지만,
반복되는 선율이 느릿한 정체 구간과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신호등이 다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택시는 아주 조금, 1미터쯤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멈춰 섰다.
쑤는 창밖의 어둠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아이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스민 향기는 여전히 차 안의 눅눅한 공기 속에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쑤는 그 무채색의 평온함 속에 몸을 맡겼다.
서두를 것도, 슬퍼할 것도 없었다.
밤은 길었고, 택시는 언젠가 그녀의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그녀는 다시 이름 모를 사원의 그늘에 앉아
덤덤한 문장으로 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로 위엔 여전히 붉은 불빛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삶이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쑤는 가만히 숨을 내뱉었다.
에어컨 바람에 실려 온 자스민 향이 코끝에 머물다 사라졌다.
그저, 태국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