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 짝끄리(วันจักรี)가 말하지 않는 것들
— 란나와 라오스의 잃어버린 역사
축제의 이면
매년 4월 6일, 방콕은 금빛으로 물든다. 짝끄리 왕조의 개창을 기념하는 '완 짝끄리(วันจักรี)'가 되면 왕실 근위대의 행렬이 왓 프라깨우를 향하고, 국왕은 친히 역대 선왕의 동상 앞에 헌화한다. 관광객들은 에메랄드 빛 불상 앞에서 일제히 셔터를 누르고, 방콕 곳곳에 오색 깃발이 나부낀다.
그러나 그 찬란함 뒤에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 하나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 불상은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가. 그리고 이 축제가 기리는 왕조의 탄생이 누군가에게는 무엇의 종말을 의미했는가.
짝끄리 왕조는 1782년 4월 6일, 라마 1세가 강 건너편의 허허벌판에 왕궁을 세우고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의 수도 톤부리를 버리고 방콕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그날이 오늘날 태국의 가장 중요한 기념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방콕이 탄생하던 그 시절, 북쪽의 란나 왕국과 동쪽의 라오스는 서서히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벼락이 드러낸 비밀 — 치앙라이, 1434년
에메랄드 불상(พระแก้วมรกต, 프라깨우 머라꼿)의 이야기는 1434년 북부 도시 치앙라이에서 시작된다. 한 사원의 탑이 벼락을 맞아 무너져 내렸다. 잔해를 치우던 승려들은 그 안에서 흰 석고로 뒤덮인 불상 하나를 발견했다. 평범한 석고 불상이라 여겨 옮기던 중, 코끝의 석고가 살짝 떨어져 나가며 그 안에서 영롱한 녹색 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석고를 모두 벗겨내자, 세상에 없던 아름다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초록빛 옥(Jade)으로 빚어진 불상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란나 왕국의 왕은 가장 힘센 코끼리를 보내 불상을 수도 치앙마이로 모셔오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코끼리가 치앙마이 방향이 아닌 남쪽 람빵(Lampang)으로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세 번을 시도해도 매번 같은 길로 향했다. 왕은 결국 '이것이 불상의 뜻'이라 여기고 람빵에 사원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 32년 뒤에야 비로소 불상은 치앙마이로 옮겨질 수 있었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중요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 에메랄드 불상은 처음부터 인간의 권력에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머물 곳을 선택하는 영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불상이 머무는 곳이 곧 진정한 통치자가 있는 곳'이라는 믿음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이후 수백 년 동안 동남아시아 전체를 흔드는 정치적 논리가 된다.
"잠시 빌려 가겠습니다" — 226년의 약속
치앙마이의 왓 쩨디 루앙(Wat Chedi Luang)에 안치된 에메랄드 불상은 란나 왕국의 영적 심장이 되었다. 왕이 즉위할 때, 전쟁에 나설 때, 가뭄이 들 때 사람들은 이 불상 앞에 모였다. 란나의 번영과 불상의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1552년이었다. 당시 란나와 라오스(란쌍 왕국)의 왕위를 동시에 물려받게 된 쎗타티랏(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 Setthathirath) 왕이 고향 라오스로 귀국하면서 에메랄드 불상을 함께 가져간 것이다. '잠시 빌려 가겠다'는 말이 있었다고도 하고, 아무 말도 없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불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쎗타티랏 왕은 라오스의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기면서 에메랄드 불상을 새 수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화려한 사원 '왓 허 프라깨우(Wat Ho Phra Keo)'를 지었다. 라오스 사람들은 이 불상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226년이 흘렀다. 란나에서는 불상이 있던 자리에 다른 불상을 가져다 놓았지만, 그 공백은 단순한 물리적 빈자리가 아니었다. 왕국의 정신적 기둥 하나가 뽑혀 나간 것이었다.
환수인가, 약탈인가 — 1778년의 선택
1778년, 딱씬 왕의 최고 장군이었던 짝끄리(훗날의 라마 1세)가 라오스 원정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비엔티안을 함락시키고 에메랄드 불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4년 뒤 왕위에 오른 라마 1세는 방콕에 새 왕궁을 세우고, 그 가장 신성한 자리에 이 불상을 안치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국왕이 직접 불상의 의복을 갈아 입히는 의식을 만들었고, 이 전통은 오늘날 라마 10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국의 공식 기록은 이를 '정당한 환수'라 부른다. 불상이 스스로의 의지로 새로운 성군을 택해 방콕에 안착했다는 서사도 덧붙여졌다. 그러나 라오스의 역사 교과서에는 다른 단어가 쓰여 있다. '약탈'이다. 현재 비엔티안의 '왓 허 프라깨우'는 에메랄드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지만, 불상은 없다. 텅 빈 제단을 바라보며 이곳을 찾는 라오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 방콕의 완 짝끄리 축제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치앙마이도 마찬가지다. 란나에서 시작된 불상이 결국 방콕에 영구히 머물게 되면서, 북부의 영적 권위는 조용히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라마 1세는 불상 하나로 치앙마이와 라오스, 두 문화권의 정신적 중심을 방콕으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불상이 머무는 곳이 진정한 통치자가 있는 곳'이라는 믿음을 가장 영리하게 활용한 셈이었다.
장식이 된 언어, 상품이 된 왕국
에메랄드 불상의 이동이 상징적 차원의 상실이었다면, 이후 이어진 것은 보다 조용하고 체계적인 지우기였다. 근대 국가 태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방콕 정부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언어'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란나는 '태국의 북부 지방'으로 호칭이 바뀌었고, 란나의 고유 문자 '탐(ธรรม)'은 공교육에서 퇴출당했다.
탐 문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승려들은 이 문자로 불경을 필사했고, 의학 지식과 점성술, 왕국의 역사를 기록했다. 탐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란나 문명 전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문자가 학교에서 사라지자,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남이 해석해준 역사만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란나어를 캄므앙(คำเมือง)이라 한다. 북부 사람들이 자부심을 담아 부르는 그 언어는 '촌스러운 사투리'라는 프레임 안에 갇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쓸 수 없는 말이 되었고, 젊은 세대에게 전통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배경'이 되었다. 오늘날 치앙마이 카페의 간판에서 란나 문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문자는 남았으나 의미는 사라졌고, 왕국은 남았으나 주체성은 지워졌다.
칸똑(Khantoke)이라는 란나 전통 식사 문화가 있다. 원래는 귀한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던 의례적 식사였다. 지금 치앙마이에서 칸똑을 경험하려면 여행사 패키지를 예약해야 한다. 전통 공연을 보며 정해진 시간 안에 음식을 먹는 관광 상품이 된 것이다. 란나는 태국의 일부이지만 뭔가 이국적인, 방콕 사람들에게도 외국인에게도 신기하고 부드러운 그 무엇, '예쁜 북부 문화'로 소비되고 있다.
침묵 속에 잠긴 언어들
역사학자 쑤찟 웡텟(Sujit Wongthes)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란나를 태국의 일부로 가르치지만, 정작 그 역사적 주체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예쁜 장식품처럼 취급할 뿐이다."
에메랄드 불상이 방콕에 안착한 순간부터, 란나와 라오스의 이야기는 승자의 서사 안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두 지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완 짝끄리의 축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오늘, 방콕은 화려하게 빛난다. 왓 프라깨우의 에메랄드 불상은 여전히 계절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관광객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다.
그러나 비엔티안의 텅 빈 제단 앞에서도, 치앙마이 뒷골목의 땀 문자 앞에서도그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란나의 기억은 나직이 숨을 고르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언어로 쓰인다. 그러나 침묵 속에 잠긴 언어들도 엄연히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불상이 치앙라이의 탑 속에서 수백 년을 기다렸듯, 그 기억들도 언젠가 석고를 깨고 제 빛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