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태국, 사라진 란나

쾀뻰타이와 주변부의 침묵

by 태국학연구소

하나의 태국, 사라진 란나

쾀뻰타이와 주변부의 침묵


"방콕 왕조의 존속을 위해 란나의 문자가 타올랐고,
라오의 영토가 분할되었으며, 그들의 기억은 금지되었다."


이 문장은 수사가 아니다. 근대 동남아시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의 압축이다.


I. 치앙마이의 해자가 품은 비밀

오늘날 치앙마이를 찾는 여행자들은 고풍스러운 해자와 수백 년 된 사원들을 보며 "태국의 전통"을 감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자 안에 서린 것은 태국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란나(ล้านนา), '백만 개의 논'이라는 뜻을 가진,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꽃피웠던 왕국의 흔적이다.

오늘날 태국은 단일한 언어, 단일한 문화,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나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통일성은 처음부터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란나는 단순히 '통합'된 것이 아니라, 방콕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재정의되고, 축소되고, 끝내 지워졌다.

이 글은 그 지워짐의 역사를 따라간다.



II. 란나라는 세계

란나 왕국은 1292년 망라이 왕(พญามังราย)이 치앙마이를 수도로 삼아 건국했다. 오늘날 태국 북부 전역과 미얀마 및 중국 윈난성 일부를 아우르던 이 왕국은, 결코 변방의 소왕국이 아니었다.

란나는 '뚜아 므앙(ตั๋วเมือง)'이라는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문자로 불교 경전, 법률, 의학, 역사, 점성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이 기록되었고, 수백 년에 걸쳐 사원을 중심으로 축적되고 전승되었다. 15세기 띠록까랏 왕(พระเจ้าติโลกราช) 시기, 란나는 치앙마이에서 태국 역사상 최초의 경전 정비 사업으로 평가받는 제8차 불교 결집을 주재할 만큼 지역 문명의 정신적 중심지였다.

1558년 버마 따웅우 왕조에 정복되며 란나는 약 200년간 버마의 지배 아래 놓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란나의 문자와 문화는 사원을 통해 면면히 이어졌다. 1774년 까윌라 왕(พระยากาวิละ)이 싸얌 왕국의 지원으로 버마를 몰아냈을 때, 란나인들은 독립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란나는 버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싸얌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을 뿐이었다. 외부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 란나의 자립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III. 라마 5세: 제도라는 이름의 포위

19세기 말, 라마 5세의 개혁은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제국주의 세력 사이에서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대응은 외부를 향한 방어이면서 내부를 향한 재구성이기도 했다.

1892년부터 단행된 '텟싸피반 행정 개혁(การปกครองแบบเทศาภิบาล)’은 각 지역의 왕족이 다스리던 반자치 구조를 해체하고, 방콕에서 파견된 관리가 통치하는 행정 구역 체계로 전국을 재편했다. 란나 지역은 '몬톤 파얍(มณฑลพายัพ)'으로 묶였고, 1899년을 기점으로 란나의 왕족들은 실질적 통치권을 상실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란나의 자율은 이렇게, 조용히, 행정 문서 한 장으로 끝났다.

교육의 영역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1898년 교육령은 전국 사찰 학교에서 방콕 표준 태국어를 교육 언어로 지정했다. 란나 문자를 가르치는 것은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배제되었다. 라마 5세는 또한 "역사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각 지역의 고문서들을 방콕으로 이전시켰다. 기록이 떠난 자리에 기억은 남지 않는다. 란나의 기억을 담은 문서들이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과정은, 훗날 더 폭력적인 '기억의 소각'을 위한 조용한 전초전이었다.


IV. 라마 6세: 이데올로기가 된 민족주의

라마 5세가 제도적 틀을 짰다면, 그의 아들 라마 6세는 그 틀을 채울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영국 이튼 스쿨과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은 그는 서구의 민족주의를 태국에 이식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의 핵심 프로젝트는 '쾀뻰타이(ความเป็นไทย, 태국다움)'라는 개념의 창출이었다. 문학, 교육, 언론을 통해 확산된 이 개념은 단순한 문화적 특성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 서사와 가치 체계를 공유하는 '하나의 국민'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다.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세 기둥 아래, 진정한 태국인의 기준이 정해졌다.

문제는 그 기준이 방콕 왕실의 언어와 문화였다는 점이다. 쾀뻰타이는 다양한 지역 정체성을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들을 재배열하고 위계화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란나인들은 '타이 느아(북쪽 태국인)'로 호명되었다. 이는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 민족이 아니라, 방콕 태국의 변방 구성원으로. 수백 년의 독립적 역사를 가진 왕국이 이념 속에서 '지방'으로 격하되는 순간이었다.


V. 1932년 혁명과 잔혹한 마침표

1932년 싸얌 혁명은 절대왕정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역 정체성에 대한 압박은 이후 더욱 거세졌다.

카나랏싸던(คณะราษฎร, 인민당)이 권력을 잡은 뒤, 특히 1938년 총리직에 오른 피분 쏭크람(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은 '하나의 태국 국민' 정책을 전례 없는 강도로 밀어붙였다. 1939년부터 공포된 일련의 '문화 명령(랏타니욤, รัฐนิยม)'은 그 절정이었다. 지역 방언 사용 금지, 전통 복장 금지, 표준 태국어 강제등, 이것은 단순한 생활 규칙이 아니었다. 한 민족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정서적 압박이었다. 국가명도 이때 '싸얌'에서 '타이(Thailand)' 즉, '타이인의 땅'으로 공식 변경되었다.

'랏타니욤' 속 복장에 관한 규정


이 시기 북부 사찰들에서는 란나 문자로 기록된 패엽경과 고문서들이 조직적으로 수거되고 소각되었다. 치앙라이의 웁캄 박물관(Oub Kham Museum)의 관장인 쭐라싹 쑤리야차이(จุลศักดิ์ สุริยะไชย)는 필자에게 당시 수거된 문서들이 사찰 마당에서 7박 8일동안 밤낮으로 불태워졌다는 사실을 직접 증언했다. 이 사건이 학술 문헌에 충분히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이 이야기를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억압의 철저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불태운 쪽은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었고, 불태워진 쪽은 기록할 도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의학 지식, 법률 기록, 역사 서사, 불교 경전등 수백 년에 걸쳐 뚜아 므앙 문자로 쌓아온 란나의 지식 체계가 재로 변했다. 그것은 종이를 태운 것이 아니었다. 한 민족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를 끊어버린 행위였다.


VI. 불탄 기억, 남겨진 침묵

북부 지역에 전해지는 이 '소각'의 서사는 기억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국가 형성의 과정에서 기억은 중립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강조되고, 어떤 기억은 침묵 속으로 밀려난다. 이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제도와 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택적 소거다.

그 결과는 오늘날에도 명확하다. 태국 정부의 민족주의 정책으로 인해 란나 문자는 공식 학교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오늘날 태국 내에서 뚜아 므앙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승려, 학자, 전통 공예가, 민간 의료인에 국한된다. 반면 국경 너머 미얀마 샨주의 치앙뚱(Keng Tung)에서는 이 문자가 아직도 일상에서 사용된다. 같은 문자가 태국 안에서는 소멸하고, 국경 밖에서는 살아있는 것이다.

문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기록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기록할 도구를 잃는 것이다. 무엇이 기록되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불길 속에서 무엇이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는가이다.


VII. 꺼지지 않은 불씨 — 복원을 향한 움직임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치앙마이와 치앙라이를 중심으로, 란나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이름보다 현장을 택한 로컬 학자들이 있다.

치앙마이 대학교(CMU)는 란나 문자 온라인 강좌를 무료로 개설하고, 수강 완료자에게 수료증을 발급하고 있다. 치앙마이 랏차팟 대학교의 예술·문화 센터는 란나어를 연구·교육하고 지역 문화 유산을 기록하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독일과 프랑스의 연구 기관이 북부 태국 고문서 디지털화 프로젝트를 통해 란나 패엽경을 온라인으로 공개하며, 사라질 뻔한 텍스트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이름 없이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사원에서 홀로 뚜아 므앙을 가르치는 승려들, 전통 의학 기록을 해독하여 후학에게 전수하는 민간 의료인들, 지역 축제와 공동체 모임에서 란나어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전하는 평범한 사람들. 이들이 없었다면 이 문자는 이미 완전히 죽었을지 모른다.



동시에 웁캄 박물관 같은 공간은 단순한 유물 보관소가 아니다. 란나 문명의 기억을 수집하고, 증언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살아있는 아카이브다. 관장이 필자에게 소각의 역사를 말해준 것도 그 작업의 일부였다. 기록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기억된 것을 기록하는 일이 남은 후손의 몫이 아닌가.

이 복원의 움직임이 소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란나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VIII. 결론: 만들어진 국가, 축소된 세계

태국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찬란한 성취로 기록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지킨 나라. 그 자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성취를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가 있다. 방콕 왕조를 지키기 위해 란나의 문자는 재가 되었고, 라오의 영토는 외세와의 협상 카드로 쓰였으며, 수백 년의 지역 문화는 '미개함' 혹은 '분열의 씨앗'으로 낙인찍혔다. 그 대가는 짝끄리 왕조가 아니라 란나와 라오가 치렀다.

"하나의 태국"이라는 매끄러운 서사 이면에는 여전히 그 불길의 재가 남아 있다. 비판적 역사학자 쑤찟 웡텟(Sujit Wongthes)는 이것을 "방콕이 란나를 식민지화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한다. 외부의 제국주의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방콕은 내부에서 스스로 제국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란나의 언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문자로 쓰인 기록들이 다시 읽히기 전에, 지금도 태국 사회 안에 흐르는 지역 간의 위계와 긴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치앙마이의 해자 안, 그 돌 하나하나는 한때 백만 개의 논밭을 꿈꿨던 왕국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축소된 채 살아남은 란나의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진정한 통합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 글은 치앙라이 웁캄 박물관 관장과의 직접 인터뷰, 쑤찟 웡텟의 비판적 역사학, 그리고 란나 문화 연구자들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문서 소각 사건의 구체적 경위는 구전 및 지역 증언에 근거하며, 학술적으로 충분히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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