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글·사진: 위라퐁 쑨턴찻뜨라왓(วีรพงษ์ สุนทรฉัตราวัฒน์)
번역: 배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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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감청색 정장을 입고, 양쪽 가슴에 훈장을 가득 달고 있었다. '우리는 용감하다'는 문구가 새겨진 모자는 그들이 한국전쟁 참전용사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걸음이 가벼운 사람도 있었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80~90세 가량이었고, 집단적인 명예를 간직한 채 참전용사 귀향 행사에 참석했다. 저마다의 개인적인 기억도 함께 품고서.
개인의 기억은 타인의 기억과 비교될 때, 그리고 서로 겹치는 부분이 생겨날 때 비로소 무게를 지닌다. 그것은 서로를 연결하는 공유된 기억이 된다. 이것은 한국전쟁 기념 행사를 통해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된 1950년부터 끝난 1953년까지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날 아띠야 아라야퐁(อติญา อารยพงศ์)은 파스텔 옐로 원피스에 레이스 장식을 달고 왔다. 그녀는 왼쪽 어깨에 유엔 메달을 달기로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받은 훈장이었다. 그날은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이었다.
유엔 메달은 그녀를 외할아버지와 이어주는 매개였다. 아띠야 아라야퐁은 유엔의 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외할아버지 역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다녀온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행사에 참석하기 전, 아띠야는 외할아버지의 훈장을 옷에 달았다. 그날 그녀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참석했다. 외할머니 닌쑤탓 싸앗이암(นิลสุทัศน์ สอาดเอี่ยม)은 그 전까지 어떤 기념 행사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 우본완 아라야퐁(อุบลวรรณ อารยพงศ์)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우리 가족 전체가 한국전쟁에 대해 특별한 감흥이 없었어요. 딱히 와닿거나 유대감을 느끼지 못했죠. 우리 의식 속에서 우리는 그저 한국 참전용사의 자녀라는 것뿐이었어요. 아버지가 항상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심어주셨기 때문에요."
그때 92세의 한 노인이 그녀의 가족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자신이 한국에 파병된 6진 부대원이라고 소개했다. 여전히 건강하고 기억력도 좋았다.
"짬니안 대령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우리는 친구사이였어요. "
짬니안 싸앗이암 대령은 아띠야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는 닌쑤탓의 남편이자 우본완의 아버지였다. 아띠야는 말했다.
"저는 외할아버지와 같은 시대에 한국에 다녀온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고 싶었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외할아버지는 안 계셨으니까요. 다른 집 외할아버지들이 어떤 분들인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외할아버지에 대한 것은 가족에게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과 그의 모습을 담은 빛 바랜 사진 몇 장뿐이었다. 아띠야 아라야퐁은 그날 많은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분들 각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들이 꺼내져 다시 살아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기억이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알지 못한다. 어느 기억 관련한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노인들은 중년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경향이 강하다. 남은 시간이 적기 때문에 현재와 타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를 털어놓는 행위는 화자의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20대 초반의 아띠야가 선조의 정체성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고, 자신의 집 안에 있는 개인의 역사를 탐구하며, 아직 살아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찾아 나서게 된 출발점이었다. 많은 별들이 이미 사라졌지만, 그 별빛은 여전히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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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이 사람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요. 이건 저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 간 동기 위차이고, 이건 후배예요. 여기에는 누가 어떤 훈장을 받았는지 나와 있어요. 여기 제가 서 있는 거예요. 보이시죠? 이 훈장이 제가 받은 거고, 견장도 하나 더 받았어요. 이게 '우리는 용감하다' 모자예요. 이건 한국 정부에서 받은 훈장이고, 이건 베트남 참전 때 받은 거예요. 이 사진은 공비가 귀순하는 장면인데, 뭐라고 써 있죠?"라고 그가 물었다. 노안이 생겨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 아래 설명 문구를 읽어드렸다. "공산 게릴라 귀순. 쑤완 찐다 상위가 씽펑, 렉을 이끌어 나옴. 우리가 용서한다는 뜻에서 데리고 나옴."
"맞아요, 보이죠? 제 이름이 쑤완 찐다예요. 날짜가 언제라고 써 있어요?"
"1972년입니다."
"군에 있을 때 저는 한 가지만 원했어요. 서로 죽이지 않는 것. 팟탈룽 지역 사람들이 저를 많이 따랐어요. 우리가 용서했기 때문이죠. 귀순한 공산주의자들을 데리고 출가도 시켰어요. 뉴스가 있을 때마다 상관에게 보고용 파일을 만들었어요. 상관이 우리가 하는 일을 알 수 있게요."
쑤완 찐다 대령은 과거의 사진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공산군 토벌 활동을 보도한 신문 기사 사진들을 보며, 그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쑤완 찐다 대령의 기억은 생생하고 풍부했다. 그의 이야기를 역사적 연표와 맞춰보면, 그가 맨해튼 반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공산군 토벌 전쟁 등 거의 모든 주요 사건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86세 삶의 관찰자라면 쑤완 찐다 대령이 온 마음을 군인의 삶에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저는 1929년생으로, 지금 86살입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후, 22세의 이등병 쑤완 찐다는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손을 잡아 쥐고, 입을 열어야 하는 길. 실력으로 기회를 잡지 않으면 상관의 딸에게 잘 보이거나 아부해야 하는 세계에서, 이등병 쑤완은 열심히 일하는 쪽을 택했다. "저는 모든 상황에 몸과 피를 바쳤어요. 상관이 남쪽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갈 수 있습니다'라고 했죠.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과가 나와요. 저는 전국을 누볐어요."
1970년대에 상위 쑤완 찐다는 심리전 부대 요원으로 북부, 동북부, 남부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는 주민들에게 다가가 공산군 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했다. 그는 업무 원칙을 읊었다. "고충을 들어주고, 관계를 맺고, 자리를 잡고, 이끌고, 조직한다. '자리를 잡는다'는 건 그 사람을 우리 측 핵심 인물로 임명한다는 뜻이에요. 그를 이끌어 우리 편, 민주주의 편으로 데려오는 것. '네가 다가오면 내가 받아들이고, 네가 멈추면 내가 회유하고, 네가 빼앗으면 내가 싸우고, 네가 도망치면 내가 쫓아간다.' 심리전은 총알 대신 사상을 쓰는 거예요. 혀와 입을 무기로 삼아 사람들을 설득하죠. 이른바 프로파간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심리전 부대는 붉은 지역이라고 불리는 마을로 들어갔다. 이동 심리전 부대를 지휘하는 상위 쑤완 찐다의 지프차 안에는 영사기, 스크린, 카메라, 쌀과 건조 식품, 의약품이 실려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저는 자식이 7명인데, 부대 막사 밖에 집을 따로 얻어 살았어요. 막사 안에는 도박이 있었거든요. 아내가 끌려들어갈 수 있어서요. 다수가 있는 곳에 가면 따라가기 마련이잖아요. 아내가 군인 사회에서 어울리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일 년에 한 번 아내를 보러 가면 다행이었죠. 상관이 어떻게 명령하느냐에 달려있었어요. 이 삶은 상관에게 달려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상관에게 거역할 수 있겠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인은 상관을 특별히 중시해야 하는군요?"
"상관 밑에 있으면 상관의 뜻에 따라야 해요. 저는 상관과 함께 있을 때 상관의 양말에 구멍이 나서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오면 제가 가서 사왔어요. 집 전구가 나가면 제가 가서 갈았죠. 상관 집이 어두워서야 되겠어요. 우리는 상관을 사랑하니까요. 저는 아내와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상관을 사랑하기에 항상 마음을 상관에게 바쳐야 했어요."
젊은 시절 쑤완 찐다 대령은 군인으로서의 야망이 넘쳤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높은 산 정상에는 평지보다 자리가 적은 법. 이 냉혹한 현실이 그를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제가 죽으면 가족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러 번 죽음을 향해 뛰어들었죠. 미안한 말이지만, 가끔 낙하산을 타고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임무 중에 전사하면 계급이 오르잖아요. 그래서 임무 중에 죽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때는 높이 오를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베트남에 갔을 때도, 한국에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는 대령으로 전역했다. 지금 쑤완 찐다 대령은 차층싸오 도에서 살며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고, 책을 읽는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며, 하루에 나무 10그루를 심는 것이 목표다.
"오늘 못 심으면 내일 20그루 심으면 되죠." 그가 말했다.
"지금 저는 스스로 벌어먹을 수 있어요. 하루에 5킬로미터를 걸어요. 제 또래 사람들은 이미 걷지 못해요."
86세의 쑤완 찐다 대령은 건강하고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며, 청력에도 문제가 없고, 혼자서 어디든 다닌다. 그래서 혹시 노화의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그는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요. 저도 노인이에요. 노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예요. 가치 있게 살아야 하죠."
작별 인사 전에, 쑤완 찐다 대령은 저승에서 받은 여러 통의 편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 번째 편지는 머리가 하얗게 샜다는 것. 아이들이 아버지의 날에 까맣게 염색해줬어요. 두 번째 편지는 이가 썩기 시작했다는 것. 음식 먹기가 힘들어졌어요. 이제 죽을 때가 다가온 거죠. 아직은 걸을 수 있어요. 하루 5~6킬로미터를요. 하지만 앞으로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이에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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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의 청년이 생애 처음으로 머나먼 한국 땅에 싸우러 가며 쓴 일기장에는, 마치 전쟁 기행문 같은 내용들이 단정한 글씨로 담겨 있었다. 배 위에서의 여정, 한국의 분위기, 부산이라는 도시, 훈련, 눈에 들어온 것들, 생활 방식, 교통, 교육, 위생, 복장, 아이 키우는 법, 숙소, 그리고 전장. 전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록은 끊겼다.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의 일기장 몇 권에는 작가와 철학자들의 명언과 격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겁쟁이는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 용감한 자는 오직 한 번만 죽음을 맛본다.'
'결혼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다.'
혹은 일기 주인의 내면을 비추는 어느 이탈리아 격언:
'세상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 모두에게 길을 열어준다.'
아띠야 아라야퐁은 외할아버지에 대해, 집안의 어른이자 선함의 표본이고 가족의 영웅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녀는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옮겼다.
"외할아버지는 정말 친절하셨대요. 재능 있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며, 꿈이 있는 분이었다고요.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전부 다 믿었던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듣는 사람이 믿게 하려는 의도로 살이 붙고 색이 입혀질 수도 있으니까요. 흔한 프로파간다처럼요."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의 일기장 수십 권은 그가 1985년 세상을 떠난 후에 꺼내졌다. 손녀가 태어나기 8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2011년의 어느 날, 그의 손녀가 그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추위는 잠깐이면 사라지지만, 이 얼룩은 지우기가 참 어렵구나.'
이것이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의 일기 문체였다. 일기를 읽으면서 아띠야는 말했다.
"함께 흥분되었어요. 당시 일어난 여러 일들을 접하면서요. 외할아버지는 어떤 사건을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매우 날카로운 눈으로 보셨던 것 같아요. 제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그렇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수십 권의 일기장에 담긴 이야기는 당시 21세의 청년이 쓴 것이었다. 그때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진 앙텅 출신 젊은이였다.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비슷한 나이의 한 소녀가 앉아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은 외조부와 손녀 사이였다.
"처음 읽을 때 내면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이전 세대가 무엇을 해왔는지가 궁금했거든요. 사소한 것들에서도 내내 힘이 났어요. 외할아버지는 현실 위에 서 있는 영웅이셨어요. 완벽하지 않으셨지만,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모두가 전해준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진짜라는 것을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을 순종하게 만들기 위해,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요."
역사는 종종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준다. 수십 권의 일기장을 다 읽고 난 뒤, 아띠야는 페이스북 페이지 '태국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들었다. 처음 목표는 참전용사들의 자녀와 손자녀들이 기억을 나누고, 정보와 사진,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1년 후, 아띠야는 한국에서 'Peace Camp for Youth'라는 프로그램 소식을 들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후손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한국이 마련한 청소년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21세였던 아띠야는 혼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이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한국으로 출정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도 21세였다. 손녀도 그와 같은 나이에, 같은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손녀의 목적은 외할아버지의 기억에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집에서 수십 년을 잠들어 있던 외할아버지의 일기장이 한 소녀를 먼 길로 이끌었다. 미국의 'Korean War Veterans'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관련된 예술 활동, 학술 연구, 또는 소셜 미디어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지원금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아띠야는 아직 살아있는 참전용사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소셜 미디어에 전파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어머니 우본완 아라야퐁은 딸의 활동을 지지했다. 딸이 앞장서서 펼치는 그 활동들은 어머니 자신을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다시 데려갔다.
"딸을 데리고 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그게 우리 아버지 이야기잖아요.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들이고요.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에요. 아버지가 커피를 마시고 계셨는데 폭탄이 커피잔 위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는 킥킥대며 들었어요. 그걸 이제 딸에게 전해줬죠. 그래서 딸이 전쟁이나 한국 참전용사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면, 아버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딸은 앞을 바라보면서도 옛날 이야기를 꺼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딸의 눈에 보이는 새로운 것들은 제가 전해준 옛날 이야기가 더 이상 없어요. 새로운 이야기예요. 현대 한국, 동시대의 한국인들. 딸은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나는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의 아내이자 아띠야의 외할머니인 닌쑤탓 싸앗이암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건강하고, 말이 또렷하며 유머 감각도 있었다. 그녀에게 남편이 로맨틱한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닌쑤탓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그다지 로맨틱하지는 않았어요. 버텨나가는 삶이었으니까요. 그런 여유가 없었죠. 그이는 규율이 있고, 무엇을 하든 시간을 잘 지켰어요. 평범한 삶이었어요."
아띠야가 외할머니에게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해외에 계실 때 편지를 보내셨잖아요. 끝에 '사랑을 담아' 같은 말이 있었나요?"
"그런 말도 있었지.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 그녀는 옛 기억에 웃음 지었다.
"쩜폰 타넘 낏띠카쩐이 총리였던 시절에, 1월이 되면 장교들이 클럽에서 연회를 했어. 장교 부인들이 전부 모였지. 그이가 해외에서 돌아오면 진주 반지, 진주 귀걸이, 진주 목걸이를 세트로 가져왔는데 선물로 사다 준 거야. 그게 로맨틱한 거 아닌가? 아, 나를 생각하고 있긴 하구나 싶었어."
"외할아버지 꿈을 꾼 적이 있으세요?"
"그이가 떠난 지 벌써 30년이 넘었어. 이미 다시 태어났겠지. 이제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돌아가시고 1~2년은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 그이가 쓰던 약 냄새가 집 안에 내내 감돌았거든."
짬니안 싸앗이암 중령의 아내 이야기를 통해, 나는 항상 배움을 갈망했던 한 젊은이를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그는 주말이면 아내를 데리고 싸남루앙 광장으로 책을 사러 갔다.
"그이는 아는 게 많았어요. 독학으로 배웠죠. 싸남루앙 근처에서 책을 사면서요. 저도 같이 가야 했어요. 그때는 아직 아이가 없었으니까요. 그이가 책을 고르는 동안 저는 기다렸어요. 노점에 서서 책을 고르고 읽는 그이를 기다렸다니까요. 그때는 나이인 서점 같은 것도 없었거든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웠어요. 생각해보세요."
아띠야는 해외에서 석사 공부를 준비하면서 인사 관리 분야 인턴십을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일기장은 그녀를 과거로 데려갔고, 동시에 미래로도 내보냈다. 자연의 법칙은 빛이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관찰자에게 도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지만, 아띠야 아라야퐁은 말했다.
"그 일기장들이 어떤 의도로 쓰였든, 적어도 외할아버지는 일기 속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온 거예요. 우리가 답장을 보내지 못할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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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랏 탐쌩 대령의 아침 일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나…숨을 쉬고, 둘…눈을 뜨고, 셋…집을 쓸고, 넷…차를 닦고, 다섯…빨래를 한다. 아, 운동도 해요. 하마터면 잊을 뻔"
90세인 짜랏 대령은 두 딸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두 딸은 아버지의 기억력이 여전히 매우 좋다고 했다.
"기억력이 좋으세요. 약도 직접 챙기세요."
짜랏 대령은 여러 약통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각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전립선, 뼈, 비타민, 또 뭐가 있더라. 4~5가지 병이 있어요. 인공눈물도요. 눈이 건조해서 넣어야 해요."
"아버지는 군인이셔서 완벽하게 챙기세요." 짜랏 대령의 딸이 말했다.
"빨래도 직접 하세요. 세탁기를 안 믿으세요." "하얗게 안 세탁되니까요."
짜랏 대령이 보청기를 조정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방금 뭐라고 물었죠? 아, 새벽 5시에 일어나는데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요.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이 있어요. 누워서 머리를 베개에 대면 바로 잠들어버려요. 이 두 딸아이가 먹는 것을 챙겨줘서 배가 빵빵해요. 먹을 수 있고 잠도 잘 자고. 그러다 보면 과거는 잊혀요.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해봐야 소용없어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1950년에 26세의 이등병 짜랏 탐쌩은 의무대원으로 한국에 파병되어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동아전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지도자들은 전쟁이 태국까지 밀려올 것을 우려해 전쟁에 대비한 군의관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짜랏 대령은 그 선발 시험에 지원했다. 하지만
"저는 원래 의학에 관심이 없었어요. 공학이 좋았죠. 쭐라롱껀 대학교 공대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군 의과대학 공고가 먼저 났어요. 아버지가 시골에서 지원서를 내도록 불러서 3년을 다녔는데, 그래도 군에서는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왜 의학을 마치지 않으셨나요?"
"사생활…개인 사정으로 유보하겠습니다." 그는 치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젊은 시절의 짜랏 탐쌩이 어떤 청년이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보통 젊은이였죠. 항상 유쾌하고 즐겁게 살았어요. 여유롭게요. 부모님이 돈이 있으셔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죠." 고향은 컨깬 도로, 아버지는 건설 도급업자이자 반파이~러이 구간 운수업을 했다.
이등병 짜랏 탐쌩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한국에서 복무했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류 파일을 가져와 나에게 건넸다.
"읽어보세요. 제 여러 역할 중 하나예요. 천천히 읽어야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요. 마지막 순간에 쓰려고 정성 들여 만들어뒀어요. 서두르지 말고 읽어 가세요."
A4 용지에 연필로 반듯하게 쓰인 글의 제목은 '짜에 아이야'였다. 나는 이것이 제목이냐고 물었다. 그는 '짜에 아이야'가 한국전쟁 중 정찰 작전 이야기를 담은 1장이라고 했다.
"북한군과 마주친 이야기예요. 적군이 구덩이 입구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가 맞닥뜨린 거죠. 서로 놀랐지만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렸어요. 우리가 총을 겨눠 사격을 퍼부었죠. 읽어보세요."
나는 짜랏 탐쌩 대령 자신의 장례식 책자 초고를 읽고 있었다. 당사자는 내가 읽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음 장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그는 자신의 장례식 책자 2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은 '세종류의 닭'이예요. 개성에서의 이야기죠. 북에서 남으로 밀려드는 인파를 쓰고 싶어요. 전쟁 중에 요동친 화폐를 쓰고 싶기도 해요. 그때 저는 잠깐 부자가 됐었거든요. 그리고 그 장의 세 번째 닭, 이건 써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미끼를 던지는 사람들 이야기거든요. 피란민들을 속이고 등쳐먹는 놈들. 이런, 이미 힘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얹어주다니.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부적절한 내용이라서요."
각 장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짜랏 대령은 거의 매일 아침 자신의 장례식 책자를 썼다.
"2년째 쓰고 있는데 4~5페이지 정도 됐어요. 쓰다 지우고, 지우다 쓰고를 반복하고 있어요. 아, 이제 다 읽으세요."
"지금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죠. 그게 전부예요." 그는 웃었다.
"제 생각에 저는 앞으로 약…예측상 2년 정도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해요. 몸 깊은 곳에서 알려주는 신호가 있어요. 어딘가에 암이 있을 수도 있고요. 삶에서 남은 목표는 조금 갖고 조금 쓰는 것, 그것뿐이에요."
그가 계산한 2년,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4~5페이지를 써온 것. 왜 이것을 쓰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달리 할 것이 없어요.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어요. 물건을 주면 언젠가는 없어지잖아요. 전쟁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쓰는 이유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우리도 역사의 한 부분이니까요. 후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기록으로 남겨두는 거예요. 30페이지 이상이 목표인데, 지금은 4페이지 정도예요."
"여쭤봐도 될까요? 그날이 두렵지 않으세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무엇을 두려워해요. 다시 태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운 건 아니잖아요."
그는 웃었다. 역시나 치아는 보이지 않았다. 쩌랏 대령의 딸이 끼어들었다.
"친구들이 다 먼저 가셨잖아요." 그는 딸을 돌아봤고, 딸이 더 크게 말했다.
"친구들이 다 떠났다고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이제 동료들이 거의 없어요. 10퍼센트도 안 됩니다. 저는 원래 털어놓는 성격이에요. 예전에는 어딜 가도 왁자지껄 했는데, 이제 그런 사람들이 없어요. 아는 사람이 없죠.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미 오래 살았으니까요. 나이가 들어버렸으니까요. 마지막에 생각해보면, 저는 가족을 망하게 한 사람이에요. 지금도 매일 그 생각을 해요. 돼지 운반 하청 사업을 했는데, 반파이는 가뭄이 심한 곳이에요. 물이 없고 운하도 말랐죠. 돼지가 병이 들었고, 운반 도중 죽은 돼지를 내려 팔았어요. 손해가 났죠. 다 잃었어요. 지금도 매일 그 생각이 나요."
"그런데 아까는 과거를 잊었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슬쩍 그를 건드렸다.
그는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생각하는 거죠. 이 나이까지 살아왔어요.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이 편안한 상태이긴 해요. 그것뿐이에요. 하지만 단점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인사를 안 한다는 것. 원래 털어놓는 성격이라 친구들이 좋은데, 친구가 없으니까 늙은이답게 쓸쓸하고 외롭죠. 그것뿐이에요."
작별을 고하며 나는 짜랏 탐쌩 대령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장례식 책자를 읽을 기회가 오기를 바랐다. 언젠가 그는 그것을 끝까지 쓸 것이다. 그것이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든, 헌책방 어딘가에서 낯선 이의 눈길을 기다리든 간에.
<WAY 81호에 최초 수록된 글입니다.>
ความทรงจำของทหารหนุ่มในสงครามเกาหลี – waymagazine.org | นิตยสาร 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