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전쟁, 우리의 기억: 한국전쟁과 태국의 선택

by 태국학연구소

타인의 전쟁, 우리의 기억: 한국전쟁과 태국의 선택

1950년 여름, 방콕의 뜨거운 공기를 가르던 한 소식이 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짜오프라야 강의 습한 열기 속에서 전해진 이 소식은 수많은 태국 청년들을 한반도라는 낯선 공간으로 이끌었다. 낯선 기후, 낯선 언어, 그리고 낯선 전쟁. 그들에게 한국은 선택의 대상이기 이전에, 시대가 요구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 참전을 단지 ‘자유를 위한 연대’라는 도덕적 언어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당시 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재정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냉전의 시작과 함께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이념 갈등 속에서 생존 전략을 선택해야 했다. 한국전쟁 참전은 그러한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국가적 결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푸미폰 아둔야뎃을 비롯한 국가 지도부는 이 선택에 정치적·상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참전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방향을 규정하는 일이었고, 많은 청년들은 ‘임무’와 ‘충성’이라는 가치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의 출발은 자발성과 구조적 압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남긴 흔적은 오늘날 방콕 람인트라 지역의 ‘한국전 참전용사 마을(หมู่บ้านทหารผ่านศึกเกาห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들의 삶이 이어진 공간이자, 70여 년에 걸친 한–태 관계의 기억이 축적된 장소이다. 마을의 기념물과 공간들은 이름도 알지 못했던 나라에서 흘린 피가 개인의 삶을 넘어 국가 간 관계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 얼마나 기억되고 있는가.

한국전쟁은 종종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린다. 그리고 그 전쟁에 참전한 태국 병사들 역시 기억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머물러 왔다. 전쟁의 서사는 강대국과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그 속에서 태국과 같은 참전국의 경험은 점차 희미해진다. 이러한 ‘이중의 망각’ 속에서, 태국 병사들의 선택과 희생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고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질문으로 남는다.


한국전쟁 참전 태국군을 기리는 기억:그들의 선택은 오늘의 국제협력을 다시 묻게 한다.


태국의 헌신은 전장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태국은 쌀을 지원하며 폐허 속 한국 사회의 생존을 도왔다. 이후 태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혹독한 전투를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정전 이후에도 1972년까지 장기간 한반도에 주둔하며 재건 과정에 참여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개입을 넘어선 지속적 관여였으며, 국가 간 관계가 단기적 이해를 넘어 어떻게 축적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관계를 단순히 ‘의리’라는 정서로만 환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 이면에는 냉전 질서 속에서 형성된 전략적 선택이 있었고, 동시에 전장을 함께 겪으며 형성된 인간적 연대가 존재했다. 결국 태국의 참전은 국제정치적 계산과 인간적 경험이 중첩된 결과였다.


한편 오늘의 한국은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방산 전시회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과 파트너 국가 관계자들이 참여해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 한때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국가가 이제는 안보 협력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분명 하나의 역사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보여준 선택과 참여, 그리고 전후 재건 과정에서 축적된 신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과거 ‘도움을 받던 국가’에서 ‘협력을 제공하는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그 시간의 두께를 생각하면, 오늘의 현실은 단순한 성장을 넘어선 역사적 축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태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เพื่อนแท้ย่อมไม่ทอดทิ้งกันในยามยาก(프안태 염 마이 텃팅깐 나이 얌약)” 진정한 친구는 어려운 때에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순간에 태국이 보여준 선택은, 이 말의 역사적 실천의 한 장면이었다.

한국전쟁은 끝난 전쟁이지만, 그 전쟁이 남긴 선택과 기억은 여전히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 태국 병사들이 한반도에서 남긴 발자취를 다시 떠올리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국제협력과 연대, 그리고 평화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질문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한국유엔신문에 일부 수정되어 실려있음을 밝힙니다.

https://koreaun.com/ViewM.aspx?No=4046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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