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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은 프리퀄, 본편은 계속된다

슬로베니아

by 미우나고우나

이제 겨우 3월 되고 이틀이 지난 날. 엄마가 집에 있는 행운목이 20년 만에 꽃 피웠다며 사진과 함께 행운을 빌어준다.


아 그 나무가 행운목이었구나. 그 나무도 꽃을 피울 줄 알았던 거구나.

엄마는 20년 동안 행운에 물을 주고 있었던 거구나. 그리고 당신께서는 결국엔 행운을 꽃피우셨구나.


꽃 피운 3월이다. 열두 달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가장 싱그럽다고 생각하는 3월. 추위에 가려져있던 만물이 깨어나는 물오름 달. 그래서 나는 슬로베니아를 선택했다. 오래되다 못해 바래저 버린 내 버킷리스트 속의 슬로베니아에 가면, 왠지 행운이 따라올 것만 같아서.



20240308_145351-1.jpg 에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Belgrade)를 거쳐,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슬로베니아. 유럽 생활 동안 확실하게 배운 점이 있다면, 날씨 불평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오랜 시간 내 컴퓨터 속 바탕화면이던, 스크린 속 평면으로는 선명한 색채를 자랑하던 풍경과 온화한 기후의 축복을 받은 대륙이던데.


참, 이게 무슨 행운인지. 그럼에도 이 빗방울에 올드 타운의 돌바닥의 색이 더 짙게 선명해진다. 지독하게 내리는 비에도 광장 시장은 북적거리며, 토요 마켓엔 생생함이 느껴진다. 드래건 다리의 4마리 용의 꼬리를 타고 빗물이 수려하게 떨어진다.



20240309_134427-1.jpg 블레드 (Bled)



그렇게 고대하던 블레드에 와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날씨로 인해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더라. 낮게 깔린 구름들에 저 너머의 풍경이 가려진다. 물가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이 풍경의 반주가 되어준다. 그렇게 멍하니 저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호수를 따라 걷다, 공사로 인해 막힌 길을 다시 되돌아온다.


그래, 되돌아온다. 나는 아주 끈질기게 이 도시에 되돌아오겠다. 미련일 수도 있고, 집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쏠려버린 마음을 다시 다잡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아마 이 여행은 프리퀄(Prequel). 본편은 계속 이어진다.




드래곤다리-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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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다리(Zmajski most)와 루블라냐 성(Ljubljanski grad)



너 그 나라 가봤어? 라 물을 때, 거기에 뭐가 있는데? 하는 곳이 좋다.

유명한 관광 스팟은 없더라도 골목 곳곳을 걸어 다니며, 맛있어 보이는 빵집을 구글맵에 표시해 놓았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오기도 하고. 괜스레 안 하던 야외 러닝도 새삼 하고 싶고. 저렴하지만 질 좋은 숙소에서, 늦은 아침 빈둥대며 일어나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음식점에서 슬로베니아 덤플링 (스트루클리)을 먹고, 마침 주말인지라 바로 옆 광장에 열린 토요 마켓을 돌아다니다, 아주 새빨갛게 익은 딸기 한 바구니를 싸게 샀다며 좋아한다. 마침 또 집 앞에 있던 저 빨간 간판 가게가 숙소 주인이 추천한 맛집이라, 동네 주민처럼 잠깐 나가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낯선 공간에서 익숙함을 느끼러 왔나 보다.


늘 목적이 없어졌을 때 무언의 불안에 휩싸였었다. '사랑스러운(Ljublj)'의 어원으로부터 파생됐었다 카더라던 류블랴나 (Ljubljana)에서, 무엇을 그리 갈구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그 자체가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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