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오렌지 태양이 뜰 것 같던 나라에, 비바람이 몰아친다. 흔하디 흔한 플라타너스가 아닌 오렌지 나무가 줄지어 심어진 이 도시의 거리가 바람에 떨어져 짓이겨진 오렌지 향으로 가득하다.
가냘픈 우산이 버티질 못하고, 무릎 아래로 젖어버린 청바지 밑단이 걸을 때마다 종아리를 척척 휘감는다. 내딛는 한발 한 발마다 기분 나쁜 질퍽함이 느껴진다. 혹여나 하는 생각으로 호스텔을 찾아갔지만, 체크인 시간은 얼마나 정직하게 지키던지. 남은 시간 동안 근처 카페에서 몸을 녹여 보고자 한다.
카페 가는 길,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져내리는 비에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고민하다, 망설이는 순간 이미 늦고 만다. 천 신발에 스며드는 빗물에 정신을 차린 순간, 그 차가움에 몸이 부스스 떨린다. 걸음걸음마다 느껴지는 가분 나쁜 축축함에, 이미 스며들었다면 나 스스로 흠뻑 빠지리다. 4년 전, 미련이 되어 버렸던 세비야에 이제야 왔다. 이런 세비야에 흠뻑. 비록 이런 비오는 날씨까지도.
하루를 달다구리로 시작한다는 건 아주 좋은 선택이다. 아주 진한 초코라테에 쫄깃하고 달달한 추로스를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그래 세비야다. 가끔 비록 앉을 의자는 부족하겠지만, 바 테이블에 기대서서 무심하게 팔을 걸치고, 늘 먹던 메뉴라는 듯이 'churros con chocolate(초코라테와 추로스 하나요)'. 당신의 하루를 만들어 줄 것이다.
강렬한 캉캉 드레스에, 빨간 꽃을 머리에 꽂고, 발을 구르는 힘찬 돋움과 댄서의 손끝까지 전해지는 에너지. 가히 스페인의 정렬이라 불릴만하다. 플라멩코는 보통 춤, 노래 그리고 기타로 이루어지는데, 이날 기타리스트의 차가 문제가 있어 지각을 해버린 것이다. 배우의 치마 끝자락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어른 보폭으로 5걸음이면 꽉 차는 이 무대에서, 세 명의 댄서는 숨 가쁘도록 빠르고 그리고 강렬하게 몸짓한다. 기타리스트의 빈자리가 무색할 만큼, 그들의 감정들로 무대를 채운다. 뒤늦게 합류한 기타 선율로 무대는 한층 더 풍부해졌으나, 발 구르는 소리와 박수 리듬 (팔마스)과, 가수들의 민요가락 그리고 댄서들의 핑거 스냅 (피토스)만이 무대에 있었을 때도 깊은 울림을 주는 색다른 매력이 있다.
스페인에선 혼자 세, 네 접시 아니 다섯, 여섯 접시를 주문해도 놀랍지 않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타파스(Tapas)는 스페인에서 에피타이저처럼 나오는 간단한 안주 종류의 음식이다. 스페인에서는 혼자 여행객도 환영이다. 매 식사 때마다 3~4개의 여러 종류의 타파스를 시켜 다양한 맛을 혼자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그날도 어느 음식점을 갈까 한참 검색해 보다, 현지인이 추천 수가 많은 한 정통 타파스 집으로 갔다. 체리색의 높은 나무 바 테이블이 식당의 나이를 짐작게 해준다. 작은 식당이나 나름 유니폼을 맞춰 입은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아직 점심시간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운 좋게 구석자리의 테이블을 하나 잡고, 스페인어로 된 메뉴를 더듬더듬 읽어간다. 그렇게 심사숙고해서 2개의 메뉴를 골랐고, 직원에게 나는 주문할 준비가 되었다 열심히 눈빛으로 시그널을 보냈다. 직원이 내 시그널을 읽고 주문을 받아 적으러 수첩을 들고 온다.
우선 맥주부터 한잔 시키고. 그리고 타파스 2 접시를 주문하는데. 그녀의 영어는 짧았고, 나의 스페인어는 그녀에게 닿지를 않았다. 서로가 멋쩍은 미소와 목적을 읽은 손짓을 하다, 나는 구글맵 후기에 나와있는 '인기 있는 (popular)' 표시가 되어있는 사진을 두 개 보여주었다. 그녀는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나온 음식은 내가 생각한 조그마한 접시 위의 타파스식이 아닌, 테이블 절반 크기의 두툼한 접시에 나온 메인메뉴였던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씩이나. 나온 메뉴를 보고 어쩔 줄 몰라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직원은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보인 리액션인 줄 알았는지 뿌듯해하더라.
이럴 경우, 방법은 한 가지다. 별 수 있나. 그저 맛있게 다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