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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y 01. 2019

눈가리개를 벗어던진 여신 ‘디케’

눈가리개를 벗어던진 여신 ‘디케’    

 

“유전무죄 무전유죄!”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면서 외친 한마디. 

누군가에게는 끔찍했을, 또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기만 했던 그날의 그 공간에는 비지스의 음악 ‘홀리데이’가 흐르고 있었다.     


‘홀리데이’, 누군가는 매일이 휴일이고 휴가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긴 막장 인생에서 이제 삶의 영원한 휴가 ‘죽음’의 의미인 것을.      


배고픔과 서러움에 500만원 훔친 이는 17년을 자유를 박탈당하고, 73억 원을 훔친 이는 대통령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3년 만에 자유가 되는 현실. 바로 그 현실이 그로 하여금 울분어린 그 한마디를 외치게 만들었다. 

그 울분과 분노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형벌 불평등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유언이 되어버린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후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금 세상을 향해 비명처럼 퍼져나갔다. 

영화 '홀리데이' 포스터

장래 희망이 시인이었던 그는 너무 가난했고, 그 가난은 시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다. 강산이 세 번 바뀌어도 여전히 메아리치는 그의 시 같은 외침으로.     


유전무죄가 무전유죄를 부르듯, 쌍둥이 동생쯤 되는 유권무죄 역시 무권유죄를 부른다.


권력을 가졌다는 혹은 권력과 가깝다는 이유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느 순간 진리처럼 굳어졌다. 죄가 되지 않으니 거리낄 것 또한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조각가 베르니니. 

그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이면서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의 증축을 맡아했던 사람이다. 그의 사회적 지위는 교황의 인정 하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높았다.      


그런 그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금지된 사랑이었다. 바로 제자의 아내인 콘스탄차와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탐했고 세상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베르니니 열망은 유럽 조각의 방향을 바꿀만한 작품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바로 ‘콘스탄차 보나렐리의 흉상’이다     

‘콘스탄차 보나렐리의 흉상’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콘스탄차가 베르니니 집안의 누군가와 밀회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당사자는 베르니니의 동생이었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베르니니는 동생을 쫓아 베드로 대성당까지 가서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폭행을 한다. 또한 자신의 집사를 시켜 콘스탄차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버렸다.     

살인만은 면했지만 살인미수에 잔혹한 폭행까지 결코 가볍지 않은 죄였다. 


그런데 그가 법정에 서게 된 후 판결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 교황이 “앞으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러니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명한다”라고 말하고 그를 석방해버렸다.     


베르니니의 사주를 받아 콘스탄차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 집사는 죄를 묻지도 않았다.

그에게 폭행을 당한 동생은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한다. 유부녀와의 간통에 대한 죄를 물어 볼료냐로의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콘스탄차 역시 불경스런 간통지의 족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렇듯 돈과 권력은 언제든지 자신의 죄를 씻어낼 수 있었다. 

법에서의 인권을 위한 대부분의 장치는 그러한 세탁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죄와 허물은 언제든지 씻어낼 수 있다는 법 위에 존재하는 이들. 그 법이 인간의 법이든 신의 법이든 가리지 않는다.

     

신의 법은 믿음이라는 수단이 있어 구차한 판결문조차 필요치 않다. 

물질로 하여금 영혼의 죄를 대신하도록 만드는, 바로 중세의 ‘면죄부’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증명서 면죄부.

중세 면죄부

이 증명 하나만으로도 죽어 연옥에 머무르는 시간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 해서 누구나 탐내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선 지옥에 간다는 상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죄의 경중에 따라 연옥에 머물러야 했기에 연옥은 그들에게 두려운 곳이었다.  


처음 면죄부가 등장한 것은 십자군 원정 때이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참전한 십자군에게 ‘너에게 주어질 벌을 면하도록 해 준다’는 증명을 발급했는데, 이후 참전 대신 기부금을 내는 사람에게도 같은 증명을 발급했다.      

종이 쪽지 하나에 이름 문구 하나만으로 충성을 약속받고, 돈까지 벌 수 있으니 교황청의 입장에서 엄청 남는 장사인 셈이었다. 


한번 맛본 꿀단지에서 파리가 떠나질 못하듯 이들 또한 그 달콤함에 빠져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자금이 필요하거나 청산해야 할 빚이 있을 때는 엄청난 양의 면죄부를 판매해 돈을 끌어 모았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연옥에서 벗어나겠다는 열망과 언제든 필요한 자금을 쉽게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물론 신앙심이 깊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국의 열쇠 장사에서 에누리는 없었다. 당시 이것을 사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평민들이 몇 달을 일해 한 푼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큰 돈이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면죄부는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벌을 면제 받는 것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적용된 것이다.      

면죄부를 사는 농부의 딸

사후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의 무전 유죄는 더 가혹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속의 인물 ‘장발장’은 가난한 사람이 현실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자로 가난과 배고픔이 일상이던 장발장. 그는 불쌍한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면서 고달픈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죄수번호 24601’로 불리며 19년을 어두운 감옥에서 살다 출소해서도 20년을 냉혹한 경찰 자베르에게 쫓기게 된다.     

가난은 평생의 깊은 상처를 만들지만 장발장은 그 상처마저 보듬어 안는다. 

그는 자신의 조카와 가난한 이들의 기댈 데 없는 아픔마저 그의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아픔들은 고스란히 그의 몸 구석구석에 문신처럼 자리한다. 


헤어날 수 없는, 그러면서도 그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모든 아픔들은 한 아이를 만나면서 치료하게 된다. 

그 치료는 판틴이라는 불쌍한 여인의 부탁으로 그녀의 딸인 코제트를 구하러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베르의 계략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을 구하고 스스로 감옥으로 간다. 하지만 곧 탈옥해 ‘종달새’라 불리는 코제트를 구한다. 

이후로도 자베르를 피해 수녀원 등지에서 숨어 지내며 코제트를 키운다. 그러다 마리우스라는 젊은이와 짝지어주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장발장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추락한 인생들의 이야기이면서 인간의 영혼이 정화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아름답게만 보지 못하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달라져도 아픔은 살아남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추락하는 사회를 따라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의 여건도 추락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도 장발장의 재판관들은 빵 한 조각에도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며 힘 있게 판결봉을 내려치고 있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미사여구로 기소조차 하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묻고 있다.


법 집행의 객관성과 형평성이 애초에 존재했던가? 이런 의문이 오늘날까지 계속된다는 것은 결국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명심보감>의 ‘뇌물과 부정이 천하에 가득해도 죄는 박복한 사람만 구속한다’는 말이 이 시대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들의 판결이 가족을 해체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미래에 어두운 먹구름을 드리울 수도 있다. 박복함이 박복함을 낳는 기형적 구조가 반복될 뿐이다.     


그림 속, 재판을 앞둔 한 사내가 유치장에 갇혀 있다. 한 집안의 가장이 갇혀 있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아내와 아이들이 그를 면회하고 있다. 

프랭크 홀, '유치장에서의 면회'

그동안 화가들이 그려오던 왕족이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우리 곁에서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평범한 삶의 모습이란 배고프고 조롱받을지라도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려고 한다. 

돈이 없어 창살 너머로 만나야하는 가족의 모습에서 우리는 ‘유전무죄, 무전 유죄’를 읽는다. 


그에게 법의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힘없고 가난한 집의 가장일 뿐이다.     

그가 유치장 안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좌절뿐이다. 전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얼마나 권력자와 가까운가에 따라, 얼마 만큼이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창살은 콘크리트 벽일 수도 있고, 종이 문일 수도 있다. 무엇이 정의인지 이제 혼란스럽다.     


법의 정의로움도 돈과 권력 앞에서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있다. 정의란 애초부터 기울어진 저울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를 외친다. 한국의 대법원 중앙홀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 ‘디케‘를 모티브로 법의 공정함과 엄중함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정의의 여신 '디케(유스티티아)'

눈을 가리고 있는 그대로 느끼는 정의의 여신처럼 고뇌하는 고독한 수도자여야 할 이들이 이제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강한 자 앞에서 순종하는 이들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약자들을 쥐어짜서 더 작고 더 온순하고 더 열등한 종으로 만들어 왔다. 대신에 강한 자들에겐 강한 근육과 날개까지 선물하며 그들이 하는 일과 결과에 수수방관하고 있다.

수많은 불공평함으로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는 관료주의는 결국 눈을 가린 정의 여신이 아닌 눈먼 정의의 여신으로 퇴화시킨다.      


근대화라는 풍요의 이면에 숨은 사회의 부조리, 시대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 정신의 비어버린 곳간, 결국 이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화지체 현상’이다.


결국 시대와 동행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법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법, 누구나 그 부당함으로 피해입지 않는 법, 약자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법이야 말로 한국의 미래를 따뜻하게 만드는 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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