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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y 01. 2019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맹자가 이르길 ‘羞惡之心 義之端也’이라 했다. 

‘수오지심, 즉 부끄러움과 증오심은 정의의 씨앗’이라는 말이다.

공자는 ‘덕으로써 다스리고 예로써 질서를 유지한다면 잘못을 수치로 알고 바르게 될 것(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이라고 했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지탱해 주던 도덕은 그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한 수치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민망하고 모멸적이다. 

부끄러움은 손끝 가시처럼 남아 우리를 아리게 하지만 애써 못 본척하는 지금의 모습.

하지만 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은 감출 수 없어 돌려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시인 조연희는 그의 글 ‘천국엔 부끄러움이 없다?’에서 이 부끄러움을 시인의 시각에서 보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부끄러움’을 느껴 무화과 잎으로 나체를 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선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말인가. 

천국엔 아예 부끄러움이 없었단 말인가. 

아 아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나를 자각한다는 의미일텐데 그렇다면 천국이란 자아가 없는 곳이었단 말인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알게된 '부끄러움'

스스로 생을 달리한 한 국회의원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등진 그의 결단을 옹호할 순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건 자신을 자각했음에 대한 경의의 표현은 아닐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 할 때 그만큼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내어 놓았으니 말이다.     


어느 날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사람,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살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잊어갈 때, 그 잊어버린 부끄러움이 또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다. 


어쩌면 그리워진다는 것, 따뜻해진다는 건 달라진 세상 풍경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사람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 냄새, 우리 곁에서 상상 존재해왔지만 우리가 피하고 살았을 수도 있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지’ 하고 생각하게 될 때서야 비로소 그 존재를 기억한다.     


부끄러움 앞에 고개를 숙일 즈음이면 박완서씨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떠오른다.     

작가는 폐허에서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보다는 ‘무엇을 가졌는가?’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순수한 감정을 상징한다.      

박완서의 1976년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먹고 사는 게 중허지, 그깟 몸이 깨끗해봐야 뭐해?’라며, 양공주가 되라고 압박하는 어머니에게서 소설 속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부농에게 시집가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이혼한다. 이후 이어진 두 번의 결혼. 

그녀에게 매춘을 강요한 어머니도 부끄러움이었고, 세 번의 결혼도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다 만난 예전 친구들의 웃음과 포즈에서 부끄러움의 속살은 퇴화해버린 빈껍데기만 남았음을 보게 된다. 친구들의 허위 의식이야 말로 진정한 부끄러움이란 걸 느끼게 된다. 


그녀가 만난 친구들의 세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부터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상실한 채 출세를 위해, 물질로 세워진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녀는 이 시대에 대놓고 말한다. 학원이라도 세워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훨훨 날리고 싶다고.      

그런데 작가는 소설에서 ‘부끄러움은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부끄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거짓된 현실, 물질적인 욕망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작가는 왜곡된 가치의 비틀어진 질서 속에서 우리를 찾고자하는 노력을 말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선함과 악함의 구별에서 그 기본 바탕이 된다.     


천재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그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신 앞에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부분

종교인으로서 돌아본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성 바르톨로메오에 자신을 심어 놓는다.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한 성인이다. 미켈란젤로는 칼로 정교하게 벗겨진 성자의 얼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움 앞에 차마 그대로 바라볼 수 없어 두 눈을 파버린다. 그 표정은 일그러져 있고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예술을 순교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며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순교자 스티븐'이나 ‘빌라도와 군중 앞에 선 예수’에서 자신이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자신을 숨겨두고 있다. ‘순교자 스티븐’에서 그는 돌 던지는 성난 무리 중에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즉, 신 앞에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자백한다. 

렘브란트, '순교자 스티븐'

‘빌라도와 군중 앞에 선 예수’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말하는 무리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려 넣었다. 안하무인이었던 자신의 부끄러운 허물에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렘브란트, ‘빌라도와 군중 앞에 선 예수’

그의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은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허름한 옷차림의 탕아의 모습에 자신을 표현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이 작품은 그의 인생 여정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나눠준 재산을 탕진하고 병들어 돌아온 탕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장면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말없이 아들을 보듬어주는 아버지의 손길에서, 불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형의 모습에서 그 부끄러움이 불안함과 두려움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부끄러움이 보게 되면서 두려움에 떠는 탕아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워했던 마음은 슬픔과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다. 체면 때문에 혹은 삶에서의 긴장 때문에 억누르며 살았던 부끄러움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은 것이다.     


죽음을 앞둔 렘브란트는 삶이란 실수 없는, 당당한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삶을 더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그는 평생을 달려온 것이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가 그랬던 것처럼 부끄러움이야말로 스스로를 느끼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 힘은 자기를 아는데서 출발한다. 

인간이기에 자기를 아는 가운데 스스로 주어진 의무와 책임은 다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것,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예로부터 정치인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관중은 ‘관자’에서 나라를 버티는 기둥은 네 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중 하나가 부러지면 나라가 기울게 된다. 두 개가 부러지면 위태롭고, 세 개가 부러지면 쓰러진다. 그리고 네 개가 모두 부러지게 되면 나라를 잃게 된다고 했다. 

그 네 개의 기둥에서 첫째가 예(禮), 둘째는 정의(義), 셋째 검소함(廉)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둥이 바로 부끄러움(恥)이다.

세 개의 다리들이 부러지면 처방이 존재하지만 네 번째 기둥, 부끄러움이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다.     


사회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공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을 사는 사람들은 윤동주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일본 유학을 수월히 가기 위해 집안어른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로 창씨개명했던 그의 부끄러움.      

윤동주의 '참회록'

그리고 수치스러움으로 쓴 윤동주의 ‘참회록’은 오늘을 사는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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