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산 Apr 28. 2019

무리수는 무리수를 낳고

무리수는 무리수를 낳고 


수학자 피타고라스. 그는 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다. 아마도 ‘피타고라스 정리’로 인해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정리와 달리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유리수.

그가 보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였다. 세상 모든 것은 유리수로 말할 수 있다는 이 생각은 피타고라스 학파를 지탱하는 확고한 철학이었다.     

세상은 유리수만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믿은 피타고라스 학파

어느 날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히파소스가 분수로 표현되지 않는 수, 즉 ‘무리수’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유리수로 설명할 수 없는 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피타고라스 학파에겐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들의 생각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큰 사건인 것이다. 

결국 무리수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히파소스는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밝혀진 진실이 그 동안 믿고 있던 신념을 무너뜨릴 위기에 처하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일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종 목격되어온 일이다. 대부분 권력을 쥐기 위해, 혹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은폐와 조작이 이루어졌다.     


해방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4.3 제주 양민 학살의 경우 권력을 잡으려는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주도민들의 민주항쟁을 탄압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8년 가까이 저항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 제주도에 사는 사람 3만여 명이 희생되고 107개의 마을이 불타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무리수에 무리수를 두면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반세기 이상을 4·3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에 가까웠다. 그것을 밝히려는 시도는 철저히 물리력으로 억압했다.     

제주4.3평화공원 모녀상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라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가수 안치환은 ‘잠들지 않는 남도’에서 제주의 반세기를 통곡과 반역의 세월이었다고 노래했다. 매년 4월이 되면 아름다운 땅 제주를 ‘아픔의 섬, 침묵의 섬’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그 은폐의 뚜껑이 열리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이런 아픈 역사들과 그것을 은폐하려는 사람들 앞에 당당히 속살을 보여준 이가 있었다.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는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다. 말년의 그는 시대의 아픔에 함께한 작가였다.     


2003년 2월 유엔미국대표부에서 재미있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국의 입장을 밝히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이 연단에 설 예정이었다.      


그런데 세계 모든 언론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 준비를 하던 중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마련한 회견장 연단의 뒷배경이 문제였다. 반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상 장소를 바꾸는 것이 여의치 않자, 그 그림을 푸른색 커튼으로 가리라고 지시했다.      

파란색 커튼으로 게르니카를 가리고 연설하는 콜린 파월

그림 속엔 죽어가는 민간인들과 불타는 집, 죽은 아기와 울부짖는 엄마의 슬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복제한 흑백 그림이었다.      


<게르니카>에는 스페인 내전 중 일어난 하나의 끔찍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복잡한 상징이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이 오늘날 최고의 반전 그림으로 평가 받는 것은 전쟁 중에 약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희생 때문이다. 노인과 여자들, 어린 아이들이 무참히 쓰러져가는 순간의 처절함이 그림에 표현되어 있었다.


저항을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게 두려워 더 큰 무리수로 선택한 학살. 그 무리수는 결국 악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학살은 권력을 잡은 정권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것을 은폐하고 조작했다. 수많은 목격자들과 지식들은 목숨을 잃거나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양민 학살의 모든 증거 자료는 불에 태워 폐기했다. 역사가들도 이에 동조했다. 진실의 은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낱낱이 공개되고 만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는 진실은 영원히 은폐되거나 조작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림 속 상징으로 이야기했다.      



이런 학살과 은폐 조작을 고발한 그림 앞에서 미국이 전쟁을 지지하는 연설을 한다는 건 모순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연설을 막지 않았다. 그 자리에 참석한 뉴스 기자들 역시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침묵했다.      

결국 콜린 파월은 <게르니카>를 가린 파란 커튼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세계 질서를 위해 이라크 전쟁의 불가피함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해 미국은 후세인이 지배하는 이라크를 공격했다.      

이 해프닝은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에 대해 붓 하나로 세상에 알린 또 다른 작가가 있다. 

화가 ‘프란시스 고야’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돈과 권력에 의한 폭력성,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욕망으로 얼룩진 광기를 찾을 수 있다     


이전의 작가들은 돈을 줄 의뢰인들의 부와 권력을 미화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돈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화가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화가는 생존을 위해 그들의 권위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것이 화가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란시스 고양의 1808년 5월 3일

아름다움은 화려한 권력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어느 골목 시궁창이나 힘든 노역의 현장, 빈민가의 아이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애써 근엄한 모습으로 응시하는 성직자의 모습에서, 온갖 장식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부르주아들에게서,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왕족들의 그림 속에서만 아름다움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고야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갔다. 폭력과 광기에 뜯어 먹히는 나약한 사람들과 시궁창을 떠도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은폐하고 숨겨온 민중들의 힘겨운 삶을 사실적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는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권력을 추악한 괴물이라고 세상에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다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의 캔버스에는 피가 뚝뚝 흐른다. 


목과 팔 다리가 잘린 채 발가벗겨져 나무에 묶인 사람조차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의 참화> 39번에서 몸을 잃은 남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열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프란시스 고야의 <전쟁의 참화> 39번

이렇게 끔찍한 괴물의 만행을 그린 그림들은 우리에게 즐기듯이 감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사연을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다.

무리수를 둔 권력이 그것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무리수를 두는 가운데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고.     

그의 이러한 그림 속 메세지를 두고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고야야 말로 진정한 ‘괴물’이다”라고…. 


인간들에게 숨겨져 있는 피맺힌 한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권력이라는 추악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줄 아는 괴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희생이 재해든 학살이든 역사에서 그 맥락을 짚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이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든 사람들은 지난 과거를 은폐하고 사람들에게 조작된 이미지를 심어 왔다. 

그리고 역사상 긍정적이고 정의로운 부분만을 드러낸다. 이면에 있는 사실보다는 잘 꾸며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한다.     


한국에서는 4.3사건을 감추고 5.18을 왜곡하면서 그 앞에 근대화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씌워왔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말한다. 바로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용하는 정치라는 것이다.     


고야,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은 이러한 강자와 약자의 논리가 끝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집안을 장식하는 그림’을 마음 편하게 그리면서 삶을 살아갈 날. 


인간의 폭력성과 그것을 감추고 비틀어 놓은 부도덕성을 생생하게 고발한 이들의 그림은 오늘도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무리수가 무리수를 낳는 광기, 그리고 조작과 은폐가 더 이상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고….

작가의 이전글 도수 높은 술, 나르시시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