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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Apr 26. 2019

도수 높은 술, 나르시시즘

도수 높은 술, 나르시시즘     


‘나는 특별하다’거나 ‘특별해지고 싶다’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그러한 생각에 대해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말할 정도의 정신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이란 뭔가 음침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자기에 대한 ‘중독’으로 옮아갈 가능성도 크다.     

나르시시즘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러한 중독의 극단에서 나온다. 그것도 도수가 아주 높은 술에 중독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 중독은 또 다른 중독을 부른다. 깨어난다 해도 다시 그 중독에 빠져 든다.      


그리스 신화에서 중독된 자기애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나르키소스 신화다. 나르시시즘의 어원이기도 한 이 신화는 원래 연못가에 피는 수선화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랑은 처절하다기보다는 안쓰럽다는 게 맞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훈남’인 청년 나르키소스는 수많은 여성들과 요정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을 그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한 요정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은 이렇게 아픈데 나르키소스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르키소스도 자신이 느끼는 사랑의 고통에 빠져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정의 아픈 기도를 들은 네메시스는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어느 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본 나르키소스는 황홀한 그 아름다움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 자신인지도 모르고 연못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식사도 거르고 잠도 자지 않고 연못 속의 자기 모습에 빠져들었다. 


그는 마침내 연못가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은 연못가에 수선화로 다시 피어났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다.      


나르키소스의 자기에 대한 중독 ‘나르시시즘’,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에게서 넓은 스펙트럼 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대다수 건강한 사람들은 그 스펙트럼의 일정 범위에 머문다. 


문제는 그 스펙트럼에서 끝에 가 있는 경우다. 나르시시즘의 성향이 거의 없는 경우,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부풀리고 세상의 평가에 오만하게 맞서는 것 역시 사회에서 무제를 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퇴행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모습은 흔히 정치인들에게서 두드러진다.  

보통 나르시시즘은 자기 안의 약한 모습,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같이 안고 있다. 그것이 인간을 조심스럽게 하고 관계 속에서 조절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일이 어긋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그것을 덮을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 그래서 마법 같은 절묘한 꼼수에 매달린다.      


과도한 나르시시즘은 타인이 자신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이를 이루게 되면 ‘자아존중감’이 지나치게 부풀고 이상행동으로 연결된다. 

특히 정치인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관심, 그리고 인정받는 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미국의 트럼프에게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의 경우 자신에게 부정적인 신문이나 방송은 차단하고 적절히 가공된 사실을 유포한다.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지지할 인물들로 주위의 자리를 채우는 모습도 ‘퇴행적 나르시스트’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퇴행적 나르시스트, 트럼프

미국의 ‘크리스토퍼 래시’라는 사회비평가는 그의 책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정치인들의 이러한 성질을 꼬집고 있다.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극대화되면 자신이 가진 역량이나 실체보다는 대중매체를 통해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가 더 중요해지는 ‘이미지 정치’가 판을 친다는 것이다. 결국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능력보다 대중의 인기만을 따라가는 연예인으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방송과 SNS 정치에 열을 올리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편을 골라내는 패거리의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심지어 ‘나쁜 평판은 때로 평판이 없는 것보다 낫다’라며 논란을 자신의 정치에 이용하기도 한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나르시시즘과 극단의 이념, 막말이 교집합뿐이다.


배려 없고 자기중심적인 정치, 어쩌면 오늘날의 허다한 정치인들의 공통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허다한 정치인들의 공통된 성격, 퇴행적 나르시시즘

한국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나르시시즘이 극대화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수구적인 집단은 끝 모를 나르시시즘의 극단에 빠져있다. ‘내 신념만 옳다’라는 확증 편향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 꽉 막히면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라는 시끄럽고 국민은 피곤하다.      


한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움을 감수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한국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나르시스트로서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거기에 그들의 나르시시즘의 정체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그들의 지위와 역할은 국민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자신이 나르키소스처럼 스스로 잘나 빠져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결국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만든 자산은 그들에게 찍어준 대중의 표이다.      

정치인을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만든 자산은 그들에게 찍어준 대중의 표이다

그들의 자기애는 자기 안의 결함과 모순을 숨기기 위해 나타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리더가 되는 길은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 결함과 모순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편견 없이 보는 출발점이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극단적 나르시시즘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비난과 지적에 대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나의 신념이 모두의 신념이 될 수 없고, 나의 결정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잘못된 나르시시즘은 우매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


여기 평생을 자기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았던 사람이 있다. <나르키소스>의 작가이기도 한 카라바조란 인물이다.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로 17세기 유럽회화의 선구자로 불린 카라바조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던 격식이나 권유를 모두 뿌리치고 자기 확신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결국 자기애에 빠진 그를 따라 다닌 것은 싸움과 도박, 뒷골목의 음침함이었다. 그런 그가 한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다. 자기애에 빠져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카라바조. 그는 속죄하는 의미로 ‘다윗과 골리앗’이란 작품을 그렸다. 이 그림은 다윗이 골리앗의 이마에 돌팔매질 해 죽였다는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그림을 그릴 당시는 화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 선고를 받은 뒤였다. 도피 생활을 하며 언제 잡혀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흡사 다윗과 골리앗의 이미지였던 것일까?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의 얼굴은 그래서 영웅의 표정이 아니다.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림에서 다윗은 청년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당시의 카라바조로 그려놓았다. 순수한 청년 카라바조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 많고 타락한 카라바조를 죽인다는 설정이다. 그림에서 카라바조의 깊은 참회가 엿보인다. 

살인에 대한 사면의 희망을 품고 그린 것이지만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한도 배어 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얼굴을 선하고 젊은 카라바조로 놓으면서 그 시절 상냥하고 이해심 많았던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골리앗 얼굴에 늙은 카라바조를 그린 것은 누군가에 의해 징계를 받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벌하고 싶었으리라. 또한 그에게 이제 다른 삶은 없다는 절박함도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어쩌면 자기 머리를 베어버린 화가의 용기가 오늘날 한국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지도자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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