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산 Apr 25. 2019

사모님은 오늘도 취미 생활 중

사모님은 오늘도 취미 생활 중     


미술작품 경매로 유명한 런던 소더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얼굴 없는 거리 예술가’로 세계적으로 이름 난 뱅크시의 작품 경매 중 일어난 일이다. 그날 경매에 오른 작품은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라는 작품이었다. 한 소녀가 하트 모양의 빨간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모습을 담은 작은 소품이었다.     


원래 이 그림은 2002년 런던 쇼디치 근교에 있는 건물 담벼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몇 년 후 담과 함께 사라진 작품은 작가에 의해 회화로 복원되었다. 그 후 영국에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은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그림이 그날 경매에서 무려 104만 2천파운드에 낙찰됐다. 한화로 환산하면 약 15억 4천만 원 정도다.   

  

그런데 이날 낙찰을 알리는 망치 소리와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액자에 있던 작품이 파쇄기로 잘려 밖으로 빠져 나온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소더비 관계자나 경매 참관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소더비 경매장에서 파쇄되어 나오는 뱅크시의 작품

초유에 사태에 대한 진상은 SNS 동영상을 통해 뱅크시가 직접 설명하면서 알려졌다.

뱅크시가 작품을 만들 때 경매에 나올 것을 미리 대비해 액자에 파쇄기를 장착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적었다.     


″파괴하려는 충동 또한 창조적인 충동이다.”– 피카소     


그는 이전에도 예술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돈으로 환산하는 저급함을 조롱해 왔다. 비판은 예술계의 이단아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날카롭고 통렬했다. 생각을 담은 그림이야말로 최고의 도구였다. 

그는 그림을 통해 예술이 자본 시장에서 그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을 경계했다. 심지어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자 이를 비웃듯 수많은 작품을 복사해 거저 주다시피 해서 이를 조롱하기도 했다. 

예술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어야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예술계에 도전했으며, 자본에 의한 예술의 소유를 비웃었다.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 역시 이러한 예술을 독점하려는 자본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어왔다. 그 단적인 예가 한국의 재벌가 총수 부인이나 딸 또는 며느리들 사이에서 불었던 미술관 바람이다. 


이들은 기업의 사회공헌 등 여러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특성상 경영에 대한 큰 부담 없이 우아함과 고상함을 뽐낼 수 있었다.      

사모님들의 고상한 취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 작품 때문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특검에 의해 존재가 드러나면서부터다. 이후 미술관이 기업의 돈세탁 통로나 비자금 조성원으로 활용된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로 인해 미술관은 의혹들이 빚어진 음습한 배경으로 세간에 비쳤다.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한국에서 재벌가들이 만든 미술관이란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상속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작품 자체로의 평가보다는 재벌의 부(富) 증식을 위해 악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모님들이 이 고상한 취미에 발을 들인 또 다른 이유는 ‘자기과시’다.  

미술품과 마약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결코 통제되지 않는 시장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순수한 미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경우 록펠러 부인과 구겐하임 부인 등이 기금을 모아 설립되었지만 이는 예술에 대한 사랑과 공공성을 위한 것이었다. 실재로 이들은 미술관 운영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그들과 상관없는 전문가가 이를 운영하게 만들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그런데 한국에서 자본과 예술의 이러한 이상한 공생은 재벌들 간의 자존심 대결로 흐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이름 있는 작가라면 무작위로 이를 사들이기도 한다. 여기에 재벌가의 사모님들이 직접 나선다. 일부 미술을 전공한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상한 취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벌 미술관의 이러한 전문성 부재로 여러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심지어 스타일이나 서명을 위조한 위작을 구입한 경우까지 있었다. 유명작가 그림이라고 구입해 버젓이 전시까지 했는데, 이를 본 전문가들이 가짜라고 지적하자 이를 쉬쉬해온 경우가 실제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행태를 꼬집는 유명한 사건도 있었다. 


1976년의 일이다. 사건은 영국 일간지 ‘더 타임즈’의 기자에게 한통의 제보 전화가 걸려오면서 알려졌다. 화가 사무엘 팔머의 그림 13점이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정밀 조사 결과 실제로 위작임이 밝혀졌다. 제보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작품의 수준은 뛰어났다. 나중에 알려진 위작의 화가는 60세 노인 ‘톰 키팅’이었다.       


톰 키팅은 순순히 위작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위작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20년 동안 무려 2000점이 넘게 위작을 그렸다고 밝혔다. 또한 그가 제작한 작품들은 드가, 고흐, 르누아르 등 세상에 작 알려진 유명작가들이었고, 모두 진품으로 판정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톰 키팅이 위작임을 알 수 있게 그의 그림 곳곳에 위작의 단서를 심었다는 사실이다. 화가가 살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물건을 그려 넣거나, X선 투시를 하면 드러나는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이 기사화 되면서 전 세계 미술계는 충격에 빠졌다.      

작업실의 톰 키팅

결국 톰 키팅은 미술품 위조 및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진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길 바랐다고 했다. 그래서 작품 안에 가짜임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심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콜렉터들은 유명 작가의 이름만 믿고 유통했다고 한다. 예술을 작품성으로 보지 않고 재산 가치로만 보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진품과 일부러 다르게 그렸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기소 취하로 풀려났다.      


예술이 갖는 공공성을 무시하고 축재와 상속의 수단으로 삼는, 그리고 자기 과시를 위한 장식물 정도로 전락한 미술. 


우리는 그러한 미술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살아 숨 쉬는 미술을 갖고 싶다. 미술관 수장고 깊은 어딘가에서 움츠리고 있는 미술이 아닌 지친 사람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미술을 갖고 싶다. 

그것이 미술이 갖는 공공성이다.     


‘플랜더스의 개’라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국 작가 위다의 동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동화는 우리로 하여금 예술의 공공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이 동화의 배경은 안트베르펜이다. 일명 ‘루벤스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벨기에 북서부 도시다. 어느 날 이 도시에 사는 주인공 네로와 그의 할아버지는 버림받은 늙은 개 한 마리를 구한다. 그 개의 이름은 파트라슈. 동화는 네로와 파트라슈가 서로 친구가 되어 겪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화가가 꿈이었던 네로는 루벤스의 두 작품을 너무도 보고 싶어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와 <성모의 승천>이라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값으로 성당에 내야 할 ‘은화 한 닢’은 소년에게 너무나 큰 것이었다.      

에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의 한 장면

그러다 어느 혹독한 추위의 크리스마스 이브,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잃은 네로는 그 꿈을 이루게 된다.

문이 잠기지 않은 대성당 안에서 달빛에 비친 루벤스의 그림을 만난다.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했던 바로 그 그림 앞에서 네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파트라슈와 함께 바람이 부는 겨울밤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난다.     


네로가 보고 싶었던 그 그림 앞을 가난이라는 이유로 가로막았던 시절을 다시 오늘날 새로운 형태로 만나고 있다. 자본에 빼앗겨버린 예술. 


보들레르는 이러한 세태를 비판한 도미에의 그림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을 감정하는 사람들

오노레 도미에의 초상에 바치는 시

                                     - 샤를르 보들레르       

   

여기 네 앞에 화상[畵像]을 보이고 있는 사람

그는 무엇보다 섬세하였던 예술가

그의 존재는 웃음의 미를 가르쳐 주었고

한 현인으로서 그는 또한 예언자였다.     

참으로 한 풍자가로 익살꾼으로

그러면서도 그가 그리는 강력한 힘으로

약한 것과 선한 것 그리고 권력을 

자신의 심장으로 미화시켰다.     

그의 웃음은 멜모트와 메피스토의

저 흉악한 웃음과는 다른 것

알렉토의 불꽃이 던져질 때

그들은 타지만 우리는 차가워진다.     

그의 무모한 익살은 오직 가면 

이를 악물고 참는 고통이요

그의 심장은 따뜻한 햇빛으로 빛난다.

천진난만하고 활달한 웃음 속에서

작가의 이전글 애초에 여기에 빛은 없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