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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Apr 25. 2019

애초에 여기에 빛은 없었다

애초에 여기에 빛은 없었다     


1945년, 동아시아를 제국주의 시험무대로 삼았던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그들이 바라던 상황은 물론 아니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는 인류의 미래에 예측불가능한 길을 제시한 중요한 무기가 있었다.      


일본은 20세기 초, 조선을 거쳐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세력 확장은 멈추지 않고 결국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1945년 8월 6일 한 사건으로 결정되었다. 그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세계 역사에서도 중요한 날이었다.      


그날 이른 새벽, 태평양의 한 섬에 있는 미군 비행단 기지에서 폭격기 한 대가 이륙한다.

"에놀라 게이"라는 원자폭탄을 실은 이 폭격기가 향한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할 즈음 그곳 사람들은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의 활기는 한순간 끔찍한 비극으로 바뀌었다. 엄청난 열과 빛, 폭풍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원폭 이후 히로시마의 모습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그 무기는 오랜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과학을 옳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할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의 두 도시의 모습은 끔찍했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마신 이들이 심각한 중독 증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방사능의 후유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식과 손자 대까지 기형과 소아 사망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들의 희생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승리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경고했다.      

“전쟁은 이겼다. 그러나 평화는 잃었다.”     


세계는 전쟁이 끝나면서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은커녕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 

특히 방사능의 공포는 겪어보지 않은 세대조차 불안에 떨게 만든다.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설치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방사성 고양이>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방사성 고양이>는 노부부의 일상에 파고든 방사능에 노출된 고양이들을 등장시킨다. 작품은 고양이들이 유전자 변이로 인간들을 공격하게 되었다는 설정을 담고 있다. 작은 공간 속에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며 암울하면서도 비극적인 암시를 주고 있다.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의 설치 작품 '방사성 고양이'

이 작품은 1981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식사 준비를 하는 노부부가 살고 있는 공간은 인간의 영역이다. 피폭된 고양이 떼가 침입하여 사람들을 공격하는 상황은 인간에 대한 경고이다. 작가는 물질문명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인간에 대한 경고이고, 무분별한 환경파괴에 따른 미래에 닥쳐올 공포와 두려움을 암시하였다     


샌디 스코글런드는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다. 


무분별한, 무대책의 과학은 결국 재앙을 부른다는 것이다. 과학적 성과에 대한 환호는 그것이 부를 편리함에 대한 환호이다. 그로 인해 나타날 부작용은 사람들에게 나중에 생각할 문제쯤으로 구석으로 밀려난다.     

 

방사능의 위협이 처음 사람들은 각성 시킨 것은 미국의 한 시계 공장이었다. 

당시 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 중 군인들을 위한 야광시계공장에서 의문의 죽음이 연이어 발생했다. 사망한 여직원들은 팔이 저리고 살이 빠지는 등의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      

당시 시계 공장의 여공들

이들의 죽음은 주요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1932년 미국 뉴욕의 백만장자 사업가 에번이 같은 증상으로 사망하자 그때서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의학자들은 누구보다 건강을 신경 썼던 에번의 죽음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이 방사능 피폭이라는 것을 알았다.      


방사능은 그가 마시던 건강음료 ‘라디소어(Radithor)’가 원인이었다. 바로 라디소어가 방사성 물질인 ‘라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시계 공장의 여직원들 역시 라듐물감을 칠한 시계를 만들면서 라듐에 중독되어 사망한 것이다. 그녀들은 정교한 작업을 위해 라듐물감을 바른 붓을 입으로 뾰족하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피폭되었다.     


1898년 퀴리 부부에 의해 발견된 라듐은 신비의 물질로 불리며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심지어 종양의 크기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기적의 물질로 불리기까지 했다. 라듐 생수부터 라듐 화장품, 내복 등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라듐은 20세기 초 꿈의 물질이었다. 

라듐이 들어간 생수의 홍보 전단

이들의 환호는 방사능 피폭이라는 충격적인 결과 앞에 공포로 바뀌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환호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사건이 있었다. 최근 엄청난 이슈를 만들어 냈던 방사성 원소인 ‘라돈’, 이는 라듐의 아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라돈 사태는 한국 사회의 우려와 불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에서 열풍이 불었던 ‘음이온’을 발생시킨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라돈을 가정으로 들였다. 음이온 공기청정기, 음이온 팔찌, 음이온 침대까지. 웰빙 시대와 맞물려 음이온의 효과를 믿는 사람이 늘면서 음이온 바람은 거의 태풍급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음이온이 세균을 죽이고 공기를 정화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이 말이 처음 나온 진원지는 일본이었다. 그것이 한국으로 넘어와 과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혈액 정화, 세포 활성화, 면역력 강화, 스트레스 해소까지 음이온의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풀려졌다. 

음이온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맹신했다. 그 결과 벌어진 일이 ‘라돈 사태’였다.      

음이온의 대한 맹신으로 가정에 들어온 라돈 메트리스

라돈 사태가 진정된 지금 한국 사회에 다시 방사능의 공포가 대두되고 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이다. 한국에서 이 사건은 두 가지 갈등요인을 낳고 있다. 후쿠시마 수산물의 수입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 원전의 위험성과 관련한 지역과 이념 갈등이다.     


후쿠시마 수산물이 문제가 된 것은 일본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사고 원전 수습 작업은 지금까지도 거의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이 방사능의 통제는 쉽지 않다.     


특히 오염수의 유출에 대한 도쿄전력의 태도는 상식을 떠나 있었다. 

오염수의 바다 유출 사실도 도쿄전력은 참의원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정치가 지구를 터전으로 사는 인류의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터이다. 태평양 전체가 대재앙에 휩싸일 수도 있는 상황을 너무도 소홀히 취급한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 장면

오염수만이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후쿠시마의 방사선량은 도쿄 도심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문제는 원자로 격납용기를 뚫고 아래로 빠져나간 핵연료다. 이 핵연료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핵연료를 회수하기 위해 들어간 로봇은 피폭되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설령 이 핵연료를 모두 쓸어 담아 봉인한다 해도 발전소로 흘러들어 방사능에 오염된 지하수가 남는다. 

이 오염수의 양이 상상을 초월하는 양이다. 이들의 처리 역시 답이 없는 상태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과 인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바다의 해류는 한국과 연결되어 있다.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는 일본만의 재앙, 후쿠시마만의 재앙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가 맞이한 재앙이다.   


한국은 오늘날 원전을 수출하는 나라다. 원자력 발전의 규모는 세계 4위다. 이는 세계에서 4번째로 위험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 위험을 경고하는 영화 <판도라>에서 그려지는 재앙의 실체를 보고 절망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과학적 오류 운운하며 호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위험성은 숨길 수 없다, 

후쿠시마가 그랬던 것처럼 과학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원전은 선물만을 안긴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인간을 삼키는 괴물이 되는 순간을 천재지변과 만나는 순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영화 판도라의 포스터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그 와중에도 정치적 셈법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며 기시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빈번하게 지진이 발생하는 지역에 이 원전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후쿠시마 수산물을 두려워하면서 더 끔찍한 괴물을 옆에 두고 있는 모습은 아이러니다.     


한국은 결코 원전 안전 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원전 사고는 자연재해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것을 키우는 것은 망각이다. 망각으로 인한 재앙은 인재이다.


인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결국 청정에너지의 개발밖에 없다. 자칫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다면 그것은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니다. 

또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미래 생존권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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