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오래전에 개봉한 짐 캐리 주연의 영화 <덤 앤 더머>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사용된다.
사람들은 뭔가 2% 부족한 모습을 보면 ‘덤 앤 더머’ 같다고 말하곤 한다.
어리석음에 대한 은유와 상징의 표현이 되어버린 단어 ‘덤 앤 더머’.
살아가면서 이런 어리석음이 웃음을 줄 때도 있지만 그것이 경제적,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일명 ‘바보들의 행진’처럼 보이는 어리석음으로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가 빠져든다면 어떨까?
연암 박지원은 일찍이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의 책 ‘양반전’과 ‘허생전’ 등에서 경고하고 있다. 한 줌의 상투나 붙잡고 흰옷을 숭상하는 어리석음을 직시하는 풍자적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열하일기’에서는 명분 없는 소화주의에 매달려, 청의 문물과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그들을 오랑캐라 비웃는 당시 조선 지배 계층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1450∼1516)의 ‘바보들의 배(The Ship of Fools)’에는 12명의 ‘바보’들이 배에 타고 있다.
배는 별로 크지 않은데 사람들로 빽빽하게 차 있다.
배 꼭대기에는 나무 사이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남자 가면이 무표정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탐욕으로 먹기만 하다 이를 소화해내지 못해 바다에 다시 토하고 있다. 그가 붙들고 있는 나무 위로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다. 당나귀 귀를 가진 모자를 쓰고 사람형상을 한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 시대의 바보 복장이다.
돛대 대신 세워진 나무에는 빵이 매달려 있고 서로 그것을 먹겠다고 수녀와 수도사가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술병을 들고 있는 왼쪽의 수녀는 뭔가 시비가 붙어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다.
가운데 나무에 매달린 고기를 먹으려고 칼을 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탐욕에 끝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무는 풍요의 나무이면서 실상은 죽은 나무다. 나무 위에 걸린 해골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배에 올라타기 위해 주위에서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
보슈의 그림 ‘바보들의 배’는 1962년 미국 작가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가 동명의 소설을 발표해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소설은 이후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진다. 영화 속에서 이 배는 멕시코에서 독일까지 20일이 넘는 긴 항해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여객선 의사와 스페인의 정치활동가, 난쟁이, 나이든 요염한 여자, 쾌락주의자인 야구선수, 철학적인 유태인, 젊은 연인들이 등장해 끊임없이 말을 해댄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은 사랑과 싸움, 질시, 오만으로 가득하다.
그들이 도착할 즈음 독일은 나치의 지배하에 있게 되고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암울함이 유럽 대륙을 덮칠 것이란 사실을 이들은 모른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의 현실적인 자기만 있을 뿐이다.
배 안의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바보 같은 속성들을 파헤치고 있다.
최근에는 터커 칼슨에 의해 같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터커 칼슨은 이기적인 지배층이 미국을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의 지배층은 자신들만의 생각과 자신들만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초호화 저택에 살면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자신 소유의 스키장과 리조트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고 꼬집어 말하고 있다.
이는 미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어리석은 리더의 우민(愚民)정치에 의해 좌와 우, 둘로 갈려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이 싸움이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모두들 눈을 감고 있다.
성경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원래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우매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는 지도자의 우매함이 도를 넘을 때 백성과 나라의 운명은 위험에 처해진다는 의미다.
이 구절은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화가였던 피터 브뢰헬에 의해 그림으로 옮겨져 시대의 어리석음을 비판했다. 당시 그가 살던 도시 브뤼셀은 스페인 통치의 도시로, 폭정의 그늘 아래 놓여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고, 참수형을 당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라는 작품은 그러한 권력의 공포 아래 두려워하는 대중과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몽매를 비판하고 있다.
그림에서 소경의 나들이는 불안하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맨 앞의 소경이 넘어지자 뒤따르던 소경들이 도미노처럼 넘어진다.
뒤따르던 소경들은 자신이 넘어질 거라는 상상은 전혀 못하는 눈치다. 그들의 무지는 오히려 천진함으로 비친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초(楚)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칼을 물속에 빠뜨리자 뱃전에 단검으로 표시를 했다. 어리석게도 배가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칼이 빠진 자리에 흔적을 남긴 것.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표시된 뱃전 아래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칼이 있을 리 없었다.
지도자가 나라를 이끄는 선장과 갑판장, 기관장이라면 승선한 대중을 목적지에 안전하게 데리고 갈 의무가 있다. ‘각주구검’의 고사처럼 리더가 어리석다면 대중마저 그 어리석음의 피해자가 된다.
‘한비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현명한 지도자는 법을 잘 만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만 어리석은 지도자는 꾀를 부려 험악한 세상에서 맴돌게 한다(明君設法置安全 亂主謀能旋險惡).”
그 어리석음으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 맴도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