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산 Mar 18. 2019

우리 시대 꽃뱀이 된 메두사

가부장 사회의 지속적이며 광범위한 폭력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괴물 메두사는 여신의 저주를 받아 탐스러운 머리칼이 모두 징그러운 뱀으로 변해버린 인물이다. 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뱀 머리칼을 가지게 된 메두사의 모습은 그래서인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위협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메두사의 원래의 모습은 그런 흉측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보면 아테나의 신전의 사제였던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에 견줄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수많은 사람들 중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결국 그녀의 연인이 된다. 

어느 날 포세이돈과 메두사가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된 아테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를 뱀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괴물로 변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는 찾는 이 없는 외딴 섬에 유배시켜 버렸다.     


“···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통치자가 메두사를 신전에서 범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우스의 따님께서 외면하시고는 아이기스로 정숙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행동이 벌을 받지 않고 지나가면 안되기에 여신께서는 고르고의 머리카락을 끔찍한 뱀 무더기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

(『변신 이야기』)     

로라 바르니, '메두사'

그런데 다른 버전의 이야기에서는 다소 차이 있는 내용의 메두사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름다운 메두사의 모습에 포세이돈이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결국 아테나 신전에서 그녀를 성폭행하고 만다. 신전에서의 악행에 크게 분노한 아테나는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녀의 얼굴을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고 심지어 어느 누구로부터 관심 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모두 돌로 변해버리는 저주를 내린 것이다.     

카라바지오,  '메두사'

그런데 신화의 결말을 전혀 예상 밖이다. 그녀가 포세이돈의 연인이냐, 혹은 포세이돈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냐에 상관없이 그녀는 끔찍한 저주를 받았다. 물론 가해자인 포세이돈에게는 어떠한 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피해자인 그녀에게 지속적이며 폭력적인 저주가 계속된다. 


그 폭력에는 페르세우스도 등장한다. 다나에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베어오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아테나는 페르세우스를 도와 그가 메두사를 처단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렇게 해서 메두사는 두 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우리는 이 신화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성폭력 피해자가 도리어 괴물로 변해야만 하는 상황, 낯설지 않다.  

포세이돈이 아닌 메두사가 벌을 받는다는 점은 익숙한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익숙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로 변해 있다. 

남자를 돌로 만드는 운명으로 인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해자로만 존재한다. 남성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죄를 범했고 그러한 남성을 무력화하는 괴물이 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종의 꽃뱀 프레임이다. 


메두사 신화는 남성을 유혹하고 그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여성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이에 대한 처벌의 정당성을 이야기한다. 결국 신화에는 남성이, 남성에 의한, 남성중심심의 가부장적 제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러한 메두사의 죽음은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사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한 메두사는 지혜의 상징이었다. 뱀을 머리에 두르고 신과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예언하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그녀의 지위는 생명의 창조와 죽음까지도 관장하는 위대한 신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아테나 여신은 어머니의 자궁을 빌리지 않고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지혜의 여신이었다. 아테나가 메두사를 징벌하고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여성 중심의 사회에서 가부장 적인 남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의 성욕에 대해 관대해지고 여성은 순결을 강요당했다. 순결을 잃는 상황에서 여성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마저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녀 이분적인 일방성은 평범한 것이 된다. 심지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생하거나,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피해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지속적이며 광범위한 폭력에도 이들은 쉽게 노출되지 않아왔다. 

그 가해자가 권력자라면 이러한 상황 은폐는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배경에는 ‘침묵의 동조자들이 존재한다.

미투 운동을 보며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변명을 들었다. ‘술 때문에’, ‘딸 같아서 그랬다’, ‘교육이었다’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런 식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혹은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라며 ‘꽃뱀’프레임을 걸기도 했다. 

이도 아니면 ‘피해자다움’이 없으니 ‘암묵적 동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암묵적 동의는 동의가 아니다. 이 말은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주기위해 하는 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당한 상황에 대해 암묵적 동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얕잡아보는 상투적인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비겁함만 가득하다. 그들의 지위와 권력, 돈이면 응당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해온 것일까? 


그들에겐 결국 술이 문제이고, 유혹한 여자가 문제라는 말인가? 


지금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어두운 그늘 안에서 피해를 폭로하러 나오길 꺼린다. ‘꽃뱀’이라는 가해자의 막무가내가 무섭고, ‘너만 손해’라는 주위의 힘 빠지는 조언은 그들을 더욱 위축시킨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에서 그것을 잡은 자의 말은 법이고, 그 법이 곧 돈이 되고 지위가 되고 사회에서의 명망이 된다. 이 구조에 저항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들에게 각인시킨다.     


우리 사회의 미투 운동의 불을 지핀 〇〇〇 〇〇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꽃뱀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돈 많고 사치하면 돈 좋아하니 꽃뱀/ 돈 없고 초라하면 돈 필요하니 꽃뱀/ 예쁘면 예뻐서 남자들 정신 못 차리게 꼬셨으니 꽃뱀/ 안 예쁘면 안 예쁜데 성폭력 당하려고 남자 꼬셨으니 꽃뱀/ 능력과 지위 있으면 그 자리까지 가려고 몸로비 했을거니 꽃뱀/ 능력과 지위 없으면 가진 건 몸뿐이라 몸로비 했을거니 꽃뱀…”    

  

우리 시대의 피해 여성들은 메두사가 되고, 꽃뱀이 되고 있다. 메두사를 괴물로 만든 것은 결코 메두사 자신이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반드시 괴물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면 그 누군가는 메두사가 아닌 가해자여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가해자보다는 슬프고도 안타까운 메두사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작은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고산_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 건축공학(학사), 환경대학원(석사), 공과대학 건축대학원(박사),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작가의 이전글 ‘미스트’ 그 치명적인 자욱함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