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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18. 2019

권위에 대해 눈 감은 믿음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1938년 10월 30일, 그날의 뉴욕은 평화로웠다. 적어도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던 라디오에선 긴급 뉴스가 전해진다. 


“지금 지구에 화성인들이 침공했습니다.”


이 뉴스가 전해진 뉴욕과 뉴저지는 전쟁의 공포로 대혼란에 빠졌다. 긴급 대피로 인해 전화와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뉴스는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가 1898년 발표한 소설인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이란 라디오 드라마 속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무엇이 이들을 미지의 세계로부터 온 공포에 반응하고 집단 충격에 빠뜨렸을까? 게다가 화성인들의 지구 침공이라는 상황을 정말 믿고 있었을까?     

당시는 라디오의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였다. 모든 정보는 라디오에 의해 전달되던 시기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당시 사람들에겐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의 발견으로 인해 화성에도 생명체가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져있던 때였다. 화성을 관찰하던 천문학가 스키아벨리는 화성에서 운하(運河, canal)를 발견했다는 발표를 했다. 이 내용은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대한 번역상의 문제가 있었다. 스키아벨리는 이탈리아어로 "거대한 홈"을 뜻하는 카날리(cannali)라고 발표를 했는데, cannali의 발견은 운하(canals)로 번역되어 기사화되었다. 제대로 번역한다면 "channels"로 발표했어야 했다.


그리고 기사의 출처에 ‘저명한 천문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알려졌다. 이 수식어는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줬다.      


사람들은 이후로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고 북극의 물을 적도로 끌어오기 위해 운하를 만들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묘사한 이미지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지능의 발달로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발달했고, 몸은 상대적으로 가늘고 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저명한 학자의 발견이라는 이유로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을 전한다고 믿고 있던 신문마저 확신하는 기사를 내보내자 화성의 생명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과장이나 오류를 검증할 길이 없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신뢰 기준에 합당하다고 보고 그것을 믿어버렸다.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 방법은 다양하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젠 그 정보를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정보를 얻기가 어려운 경우 ‘권위’가 정보에 대한 신뢰를 주기도 한다.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정보에 대한 판단조차 흐리게 만든다.     


그 권위는 종종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여기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만 해도 신문이나 라디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정보는 화가에 의해 일반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여기 세상을 불안에 떨게 한 혁명가가 잠든 것처럼 욕조에 기대 누워 있다. 그런데 힘을 잃은 눈과 축 늘어진 그의 모습에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은근하게 다가오는 성스러움이 화면을 지배한다. 마치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의 피로 물든 십자가에서 막 끌어내려진 예수를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모습, 바로 피에타상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붉은 피가 묻은 천은 예수의 수의를 연상케 한다. 로마 병사의 창이 만든 흔적을 보는 듯한 가슴의 상처에서 숭고한 희생에 대한 아픔과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이 죽음의 현장을 지배하는 질식할 것 같은 적막함과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려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은 죽음조차도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런 장식조차 없는 어두운 벽은 거친 붓질로 그림 속 주인공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빛은 오른쪽 벽으로부터 들어와 깊은 공간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정작 인물을 향한 빛은 왼쪽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로 인한 대비는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어둡고 무겁기만 하다.      

죽은 자의 표정과 그 현장에 있는 소품들은 사람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지만 성자의 후광을 연상케 하는 머리 수건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모든 장식은 배제되어 있다. 오른쪽 허름한 탁자마저 더해져 그를 검소한 민중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게다가 벽을 무한한 공간으로 만드는 깊은 어둠은 그가 없는 혁명의 미래를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죽은 이는 프랑스 혁명에서 지옥의 집행관이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그림으로나마 그 광기를 이어가려는 치밀한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마라의 죽음>이라는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것이다. 죽어 모델이 된 장 폴 마라는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 혁명을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사람들에 대해 강경하게 비판해왔다. 또한 사회 빈민층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며 프랑스 민중의 신뢰를 얻어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명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의 무대가 된 욕조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의 명부는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프랑스인을 두려움에 떨게 한 저승 사자는 한 여인의 칼에 숨을 거둔 것이다. 피의 학살극을 주도한 과격한 혁명의 신봉자였던 마라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죽었다.      

그림은 숨을 거둔 직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비드는 자신의 영웅을 부활시키려 했다. 마치 예수가 삼일 만에 나타나 세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인 것처럼. 이 지옥의 집행관은 그림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영웅적인 모습으로, 민중의 생활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검소한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장치했다. 


그를 죽인 여인이 마라의 왼손에 들려준 편지에는 “시민 마라에게. 비참한 저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적혀있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자비’라는 단어를 향해 있다. 민중에 서서 가난한 자의 대변인이었기에 살인자마저도 자비로써 대한다는 인상을 심어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비드는 피에타의 의도를 차용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이탈리아어로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이다. '피에타' 상의 성모마리아의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마라로 대치시키고 신의 인간에 대한 자비를 민중에 대한 자비로 옮겨놓고 있다.  

검은색 자루의 칼은 다비드에 의해 흰색자루로 대치되었다. 그의 피의 숭고함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정의 창날에 묻은 성스러운 피를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연극의 한 무대처럼 어느 순간 일어나 관객에게 인사라도 할 것 같이 생생하다. 마치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그의 제자들 앞에 나온 것처럼. 


간소하면서도 단조로운 화면 구성은 마라의 순교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렇듯 다비드는 고전주의 대표적인 화가라는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세운다. 그에게 예술은 기만이었고 선동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마라의 죽음을 이용해 정보를 차단당한 대중의 분노와 증오를 증폭시킬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았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미술은 신문이 등장하면서 그 역할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알고 있는 ‘옐로 저널리즘’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들은 언론의 권위를 이용해 사람의 눈을 가리거나 선동을 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왜곡과 선동이 엄청난 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1890년대 미국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와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간의 무차별적인 경쟁에 의한 미국-스페인 전쟁을 들 수 있다. 퓰리처의 ‘더 월드’와 허스트의 ‘뉴욕저널’은 ‘전함 메인호 침몰’ 사건을 다루면서 무수히 많은 가짜뉴스를 생산해냈다. 사람들은 언론의 권위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고 말하던 퓰리처마저 그 구분을 지워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쿠바 하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호의 침몰 사고였다. 1898년 260명의 미국인 사상자를 낸 이 사건으로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더 월드’와 ‘뉴욕저널’은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경쟁적으로 이 사건의 범인으로 스페인을 지목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막대했고 작은 언론사들은 이 기사를 받아 옮기기에 급급했다. 

메인호 폭발을 다룬 '더 월드'의 1면 톱기사

‘더 월드’가 헤드라인으로 뽑은 제목은 “메인호의 폭발! 폭탄인가, 어뢰인가?” 기사 중간에 들어간 삽화는 메인호가 폭발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그려 넣었다. 

이에 질세라 ‘뉴욕저널’은 항구에서 발가벗겨진 채 스페인 군인에게 검문검색을 당하는 미국인 여성을 삽화로 내보냈다.

이 선동적이면서 자극적인 기사에 미국인들은 분노했고, 결국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으로 사상자만 5천여 명이 발생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선동적인 거짓 기사를 내보내게 만들었을까? 당시 라디오가 등장하기 이전 사람들은 정보를 접하는 유일한 매체가 신문이었다. 퓰리처는 이들 세계에서 선구자적인 지위에 있었다. 나중에 허스트가 뛰어들면서 이들 사이에는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경쟁 속에서 사실이나 증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월드’와 ‘뉴욕저널’이 벌였던 거짓과 선동은 권위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언론은 사실을 추구할 것이라는 믿음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 믿음은 맹목적인 경우가 많다. 

그 믿음이 깨지고 권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표현의 자유’ 혹은 ‘대중의 알 권리’를 내세우면 그만이다. 사실 관계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광고 등의 수입에 대한 유혹이 그들로 하여금 더 자극적인 기사로 지면을 채우게 한다.

그 기사들에 선정적 상업주의라고 욕할 지도 모른다. 자극적 선동주의, 혹은 과장된 폭로주의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과거 퓰리처와 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이들이 더 많을 거라는 확신에 부끄럼 없이 그들의 거짓 기사를 내보낸다.      

황색언론이란 말을 탄생시킨 삽화 

그들은 적당한 양의 기사에 해석이 더 많이 필요한 뉴스를 내보낸다. 그리고 자칭 ‘전문가’ 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해석을 내보낸다. 이 해석이야말로 진리인 것처럼 적당한 포장과 함께.

과거 화성침공과 같은 픽션에 뉴욕이 대 혼란에 빠진 것처럼, 죽은 혁명가를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어 피의 살육을 이어나간 다비드처럼, 이들은 사람들을 선동한다. 


권력이 되어버린 언론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들이 진실에 가까이 있다고 믿도록 만든다.     


결국 이러한 권위에 의해 왜곡되고 선동적으로 전달된 정보를 걸러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그 권위가 거짓을 전달할 때 생명력을 잃는다. 생명력 있는 권위를 창조하는 작업은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이다. 거짓을 전달하는 권위가 있다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사람들이 확고하게 이해하고, 어려운 이슈를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오늘날의 문화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이 프로젝트가 추진될 수 있다. 



고산_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 건축공학(학사), 환경대학원(석사), 공과대학 건축대학원(박사),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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