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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18. 201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눈을 뜨면, 그녀라고 부르는 나의 인공지능 비서는 간밤에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나의 건강 상태를 알려준다. 그리고 주방 시스템을 연결해 나에게 필요한 칼로리를 정확히 계산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게 한다. 공기 정화 시스템을 가동시켜 쾌적한 공기로 교체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잔잔한 음악과 함께 감미로운 커피 한 잔이 준비되어 있다. 그녀는 내 호르몬 수치와 바깥 날씨에 어울리는 외출복을 준비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나는 그녀로부터 하루 일정을 전달받는다. 

나는 그녀를 ‘갈라테아’라고 부른다. 그녀는 나에게 ‘AI’ 이상의 존재이다. 나의 건강과 사회활동, 재정 등 모든 정보는 그녀에 의해 관리된다. 결국 그녀는 나의 정보를 담은 또 다른 존재다.      

이것은 미래의 어느 날 아침 풍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구글’의 ‘에릭 슈밋’은 우리가 짧게는 20년 후면 꿈꿀 수 있는 미래라고 말한다. 


그 미래는 인간이 꿈꿔오던 모든 상상력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상상력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물 인터넷’이란 미래형 인터넷이다. 그 동안 인터넷이 사람과 기계간, 혹은 사람과 사람간의 연결만이 가능했다면, ‘사물 인터넷’은 기계와 기계간에 직접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소통을 통해 얻은 정보는 빅데이터 분석기술과 접목한다. 이는 다시 로봇 기술과 인공지능 시스템이 더해져 ‘갈라테아’와 같은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낸다.        

   

영화 <아이 로봇>의 한 장면

 영혼을 가진 존재는 아닐지라도 인간은 적어도 창조주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더 나아가 생명의 창조를 꿈꾸기도 한다. 생명공학 기술은 이미 신의 비밀을 조금씩 훔쳐보기 시작했다.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상당부분 파헤쳤다. 이제 인간의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지 그 비밀을 알려고 한다. ‘AI’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 자체를 노리고 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존재’를 향한 욕심은 이제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나 다름없다.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인간의 모든 특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나름의 정의다. 장난감 자동차가 모양이 같다고 그것을 우리가 자동차라 부르지 않는다. 자동차란 정의에는 자동차의 달리는 기능과 사람이 탈 수 있는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AI’가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진다 해도 아직은 인간의 모든 특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AI’와 달리 인간의 복제는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의 모든 특성을 가진 존재일 경우 인간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가? 종교에서는 복제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를 먼저 얘기한다. 영혼을 인간의 사고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 복제인간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신에 의한 구원의 대상으로서 영혼이라면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에 의해 생명이 주어진 존재라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담과 하와처럼 신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만이 인간일까?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나 헤파이스토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여자 ‘판도라’만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      

헤파이스토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여자 ‘판도라’

신의 창조의 과정을 거친 존재만이 인간이라고 정의한다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생명을 얻은 피그말리온의 조각은 무엇이라고 불러야하는가, 혹은 누구라고 불러야 하는가. 


심리학 용어에서 흔히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생명과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여인을 조각한다. 조각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날마다 그녀를 위해 꽃을 선물하고,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반지도 선물했다. 그녀와 대화하며 밤을 지새우는가 하면, ‘우윳빛 처녀’란 뜻을 가진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무스의 사랑을 받던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의 이름을 따와 그녀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조각상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조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 있는 사람이길 간절히 원했던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염원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간절함에 아프로디테는 갈라테아에게 생명을 선물한다. 


이로서 조각 작품에 지나지 않던 그녀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이 그림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이야기를 표현한 장 레옹 제롬의 작품이다. 

머리에서부터 서서히 인간으로 변해가는 갈라테아, 아직 완전한 인간은 되지 못했다. 그녀의 피부색은 머리에서부터 점차 인간의 것으로 바뀌고 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발 부분은 생명력 없는 흰색이다. 그리고 발아래 부분은 조각상을 지탱하기 위해 바닥과 닿아 있다. 그녀가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장 레옹 제롬_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이 그림에서 작가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써 그녀와 인간의 조건을 가진 그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메두사의 머리를 새긴 방패는 조각가의 생명 환원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메두사는 살아 있는 생명력을 빼앗아 돌로 변하게 한다. 


작가는 생명에서 돌로 변화되는 메두사의 신화와는 반대로 돌에서 생명으로의 환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왼쪽의 배경에 있는 조각상을 보면 데메테르 여신과 하데스에 납치되어 그의 부인이 된 페르세포네 조각이다. 신화 속에서 페르세포네는 살아나는 생명을 대표한다. 긴 겨울이 지나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상봉이 이루어지면 세상의 모든 초목이 생명을 얻는다. 얼어붙은 땅에서 생명의 탄생한다는 생각은 결국 갈라테아의 생명의 탄생과도 이어진다. 


작가는 배경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갈라테아의 조각에서는 생명을 넘어 인간이라는 주제가 드러난다. 아직 조각상태에 있는 발아래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이는 ‘갈라테아’가 물의 요정이었다는 이름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신으로부터 존재성을 부여받은 존재, 즉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말하는 사랑을 표현한다. 

오른쪽 위로는 그녀에게 생명을 선물한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가 사랑의 화살을 쏘기 위해 시위를 당기고 있다. 이 화살은 아직 에로스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의 사랑은 완성된 듯이 서로를 안고 사랑의 키스를 하고 있다. 갈라테아가 아직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이들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다. 생명은 머리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갈라테아의 다리는 경직되어 있다. 움직일 수 있는 상체만을 돌려 피그말리온의 목을 감싸 안고 있다. 얼굴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의 표정은 예상할 수 있다.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키스의 동작이 너무도 행복해 보인다.     

 

갈라테아의 영혼은 아프로디테로부터 선물 받았지만 육체는 피그말리온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의 간절함으로 인해 그녀는 생명을 얻었다. 그녀는 자신을 창조한 이와 사랑에 빠져있다. 

     

신화에서 우리는 하나의 불편한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갈라테아’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갈라테아와 피그말리온

여기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이 모호해진다.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근원이 무엇이냐를 두고 인간의 기준을 나누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기준이 될 좌표축이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좌표의 원점은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둘 수 있다. 욕망은 꿈꾸는 것이다.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오늘날 'AI'처럼 21세기형 갈라테아의 육체는 기계공학자가 선물하고, 영혼에 비교되는 것은 뇌공학과 신경학, 전자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선물한다. 


그 영혼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AI)이라 불린다.     

 

'AI'와 ‘갈라테아’, 둘 사이에는 같은 듯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욕망이다. 'AI'는 이성적 판단이 핵심이다. 꿈꿀 수 없고 지향하지 않는다. 'AI'는 사랑을 욕망하지 않지만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아는 사랑을 욕망한다. 'AI'는 사랑이 없어도 고통 받지 않는다. 하지만 갈라테아에게서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고통으로 채워질 것이다. 비록 갈라테아가 피그말리온에 의해 태어났지만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복잡하고도 정교한 욕망을 선물로 받았다. 인간으로의 좌표 위에 놓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피조물의 조건을 뛰어넘게 하는 것은 바로 욕망하는 존재다. 


그런데 욕망은 자유의지를 전재로 한다. 인간으로 가기 위한 새로운 전재가 요구되는 것이다.

알베르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일화에서 자유의지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 창조주의 명령을 어기면서 주체로서의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마음껏 욕망하고 지향하게 된다.     

'AI'에게 금지된 선악과는 자유의지이다. 반면에 갈라테아에게는 욕망을 향한 자유의지가 주어졌다.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녀는 그녀만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 그렇다면 욕망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욕망은 좌표 상에 놓일 조건을 충족한 것이다.


생명 복제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욕망은 새로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인간 복제물인 클론들을 한낱 욕망의 대상이지만 그들 역시 욕망의 주체이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클론들은 통제와 규율 속에 존재하지만 자유의지와 욕망은 지닌 존재다. 그들은 행복의 땅,'아일랜드'를 꿈꾼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욕망의 실현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행복을 꿈꾸는 것이 금지된 존재다.       

   

영화 아일랜드의 한 장면


인간을 위한 소모품, 사용 후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다. 이것이 클론의 운명이다. 


클론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절규한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과학자들이 이들에게 내리는 정의는 간단하다. 시스템 속에서 설계되고 인간을 위해 희생될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고. 시스템의 논리 속에 갇힌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스스로 날기를 꿈꾸는 새가 아닌, 인간에 의해 조종되어 나는 비행기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스템은 그들을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클론은 17세기 데카르트가 시도한 ‘동물기계론’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삶의 과정을 기계의 구성요소와 작동원리로 규명하려 했다. 18세기 들어 라메트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 자체를 기계로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클론들이 실험실에서 복제되어 태어난 시스템의 산물이라도 그들의 심장엔 인간의 피가 흐른다. 그들은 사랑을 꿈꾸고 유토피아를 동경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인간 복제 기술까지 가지 않고 유전자 조작에 의한 생명만 보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정의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AI'는 0과 1, 두 개의 숫자놀음이지만 인간복제나 유전자 조작은 네 개의 문자 조작이다. 

생명공학기술을 이해하려면 이 네 문자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네 개의 문자는 유전 정보의 최소 단위인 DNA 배열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티민(T), 즉 A, C, G, T의 ‘무작위한’ 배열에 기인한 DNA의 구분이 ‘미세한’ 종(種)의 구분이 된다. 이런 DNA 배열의 집합이 바로 유전자(gene)이다. 게놈(genome)이라고도 하는 유전체는 한 개체의 전체 유전 물질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약 30억 개의 DNA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의 생명공학기술의 발전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 결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생명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유전자 조작기술을 어디까지 활용할지, 열성 유전자를 제거할 기준은 무엇인지 등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조작된 인간에게 인간이란 이름표를 달아 줄 수 있는가이다.

영화 <가타카>의 포스터

유전자가위가 현실화하기 전인 1997년의 영화 <가타카(Gattaca)>라는 영화가 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완벽한 우수 유전자만을 모아 편집된 인간이 그 사회의 상층부를 이룬다. 반면 부부간의 관계에서 태어난 인간은 열등한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를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유전자로 모든 게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충분한가를 묻게 된다. 인간의 본질과 기술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메울 것인가? 지금 가는 길에서 잠시 멈춰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질 시기이다.      


과학기술의 힘을 이용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세상이 과연 유토피아인가? 


정상은 인간이란 표식이 주어지지만 비정상은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그 기준대로 나뉘어 변형된 유전자는 자식과 손자, 대를 이어 전달될 것이다. 인류 역사는 노예제로 인종 차별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쟁취 과정이다. 아담과 하와 이후 자유의지는 신이 선물이 아닌 인간이 쟁취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가 뿌리째 흔들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한 장면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주인공인 인조인간 ‘앤드류’는 그의 특권인 영생을 포기한다. 인간이 아내와 죽음을 맞이하는 그가 한 말은 지금의 시대에 유용한 말이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얻고자 했던 것.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도 소중한 것, 그것이 자유지요.”          


고산_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 건축공학(학사), 환경대학원(석사), 공과대학 건축대학원(박사),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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