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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18. 2019

그 쓸쓸한 욕망, 샹그릴라 신드롬

영원한 생명, 영원한 젊음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그 쓸쓸한 욕망, 샹그릴라 신드롬   

   

영원한 젊음, 쾌락, 행복의 땅. 우리는 그곳을 ‘에덴’, 혹은 ‘엘도라도’라 부른다. 자이나교와 힌두교에서의 메루산이나 도교에서의 무릉도원과 유사한 곳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곳을 ‘사람들의 충족되지 못하는 현실이 갈망의 형태로 상상의 땅에 투영된 곳’이라고 했다.     


욕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전설의 땅,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이 땅은 갈 수 없기에 사람들은 더욱 강렬하게 집착한다. 유토피아의 어원이 ‘없는 땅’인 것처럼 허구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랜 세월 이곳을 찾아 나선다. 영원한 젊음과 쾌락을 꿈꾸면서.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가장 강렬한,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욕망이 바로 자신의 젊음을 유지한 채로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신화로, 때로는 문학으로, 미술로 남아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다.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갈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험난한 여정을 떠나고, 이집트에서는 사후에도 영원한 삶을 위해 신체를 보존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 미라를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영원함에 대한 욕망은 그리스 문명으로 넘어와 더욱 정교해지고 구체화된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생각한다. 

이러한 구분은 쿠마에 무녀 시빌(Cumaean Sibyl)의 신화에서 두드러진다. 시빌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으로, 그러면서 오늘날 헛된 욕망의 대명사로 풍자되고 있다. 

쿠마에 무녀 시빌(Cumaean Sibyl)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보면 아폴론 신은 그녀를 몹시 사랑했기에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양 손 가득 모래를 들고 와서, 이 모래의 숫자만큼 생일을 갖게 해달라고 말했다. 시빌은 아폴론 신에게 영생을 빌어 그 소원대로 영원히 살게 되지만, 영원한 젊음을 요구하지 않아 한없이 늙어만 간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녀의 늙은 몸이 오그라들자 작은 항아리 속에 넣어져 지내다 마침내 목소리만 남았다고 한다. 영원한 생명은 젊음을 유지했을 때 의미가 있음을 그리스 사람들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젊음이 유지되지 않는 생명이란 고통뿐.      


그 고통, 그 절망은 엘리엇의 ‘황무지’란 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아폴론과 쿠마에 무녀 시빌(Cumaean Sibyl)

시빌에게 젊음이 없는 삶은 죽음보다 더한 고단한 삶이었을까? 영생의 욕망이 그녀에겐 오히려 저주였을까? 죽음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시빌에게 이젠 영생은 형벌이다.      

영생의 목적과 의미를 이야기하는 신화도 있다. 그리스 신화의 엔디미온의 신화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젊음의 목적이 쾌락에 의존함을 이야기한다.


닫힌 세계에서의 젊은 상태의 영생은 헛되고 또 헛되다고 말한다.


엔디미온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엘리스의 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엔디미온이 어느 날 올림포스산에 올라 신들의 정원을 지나는데,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헤라가 빠져들고 만다. 이를 알게 된 남편 제우스가 엔디미온에게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벌을 내린다. 

엔디미온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느꼈는지 제우스는 영원한 잠에 빠져드는 벌을 내리면서 영원한 젊음을 선물했다. 영원히 잠든 그가 누군가를 다시 유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제우스의 생각과 달리 그의 딸 아르테미스가 엔디미온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지로데, '잠자는 엔디미온

아르테미스는 처녀의 수호신으로 순결함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목욕 장면을 엿봤다는 이유로 사슴으로 만들어버린 ‘악타이온의 저주’에서 보듯이 그녀에게 순결은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조차도 엔디미온의 출중한 외모만큼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밤마다 앤디미온이 잠들어 있는 라트모스의 동굴을 찾아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그와 함께 밤을 지세우고 갔다. 아르테미스는 그녀의 순결을 욕되지 않게 하면서도 사랑의 감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후 앤디미온은 순수하면서도 영원한 청춘의 상징이 되었다.  

   

시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만 젊음을 얻지 못해 저주가 되어버렸고, 엔디미온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젊음을 모두 얻었지만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시빌에게 영원한 생명은 무한히 늙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디미온에게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정체를 의미했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을 했다가 노화하며 안식, 즉 죽음에 이르는 것이 마땅함에도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벗어나 고통이 된 것이다. 결국 영원함이 고통이 되었다     


그 영원함의 고통은 문학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유명한 심미주의 소설이 있다. 오늘날의 꽃미남으로 불릴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리언 그레이를 타락시키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화가 바질이 스무 살이 된 도리언 그레이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고 있는 작업실에 바질의 친구 헨리 경이 찾아오면서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도리언 그레이와 처음 대면한 헨리는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순수한 귀족청년이었던 도리언을 방탕과 악의 길로 이끈다.

헨리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라며 어지러운 말로 도리언 그레이의 도덕관념을 흔들어 놓는다. 그는 또한 ‘외모로써 판단하지 않는 자는 천박한 인간뿐. 외모의 아름다움은 천재의 한 형태이며 사실은 천재 이상의 것’이라면서 도리언의 출중한 외모를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그는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관능밖에 없다네. 마치 관능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영혼밖에 없듯이…”라고 말한다. 감각적이고 향락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야 말로 영혼을 깨우는 길이라는 것이다.     


헨리의 발언에 빠져 있던 도리언은 계속되는 대화 속에 어느 순간부턴가 헨리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바질이 어느새 완성한 초상화를 보고 뭔지 모를 슬픔에 잠긴다. 헨리와의 대화가 끝나고 돌아본 자신의 모습은 초상화에 비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영화 도리언 그레이의 한 장면

이제 시간이 흐르면 그 초상화 밖의 자신은 점점 늙고 추해질 것이지만, 초상화 속의 자신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것이란 생각에 질투심마저 느껴졌다.    

 

자신에게 닥칠 미래에 격정적으로 울어버린 도리언은 “영원한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나 자신이고, 늙어가는 게 이 초상화라면…!” 하고 외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바램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그를 담은 초상화가 그가 겪어야 할 노쇠와 죄악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인생의 모든 쾌락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라는 헨리의 권유를 받아들인 도리언 그레이는 순진한 겉모습과는 달리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종한 생활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퇴폐적이고 부도덕한 삶의 영향은 도리언의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락방에 숨겨 둔 그의 초상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점점 캔버스 위의 도리언은 하루가 다르게 비열하고 험상궂은 모양새가 변해간다.     


어느 순간 도리언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예전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헨리는 ‘이기심이 없는 사람들은 빛깔이 없다’며 ‘아름다운 죄악은 아름다운 물건과 마찬가지로 돈 많은 부유층이 누리는 특권이니 자기의 죄악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한다.     

헨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도덕과 선량함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운다. 교양 있는 사람이 자기 시대의 표준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일종의 가장 심한 부도덕이며, 선량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국 보수층의 종교적·윤리적 위선을 공격하는 헨리의 말에 도리언은 안심하며 다시 방탕한 생활로 돌아가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가 궁금해 다락방에 올라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추악하기 짝이 없는 형상을 하고 있는 초상화 속의 도리언이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초상화를 칼로 찢어버린다.     

그러나 그 순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은 그림 속 도리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수십 년 동안의 죄악과 방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초상화의 추한 모습은 어느덧 도리언에게 옮겨가고, 스무 살의 순진한 외모로 자신을 조롱하듯 바라보는 그림 앞에서 도리언은 숨을 거두고 만다.     

영화 도리언 그레이의 포스터

젊음과 아름다움의 순간은 짧다. 그 유한성을 극복하려던 그레이에게 찾아 온 것은 비극이다. 


사람들은 젊음은 아름답고 늙음은 추하다고 단정지어버린다. 이제 그 욕망이 신화가 아닌 현실에서 하나의 신드롬으로 나타난다. 샹그릴라 신드롬이란 새로운 사회현상이다. 늙지 않고 살고 싶은 욕구가 확산되는 현상을 말한다. 1933년 출판된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한 마을 이름에서 비롯됐다. 평생 늙지 않고 영원한 청춘을 누릴 수 있는 가상의 지상낙원으로부터 이 말이 탄생했다. 

이들은 건강과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의료기술의 힘을 빌리거나 옷차림과 운동을 하는 등 젊은 층 못지않게 외모와 동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신화 속 영원한 생명과 젊음을 주는 넥타와 암브로시아는 현대 의학에서 여러 약물로 대체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말한 ‘젊음의 샘’은 수술대 위로 옮겨졌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젊음은 인간의 오랜 욕망이기에 탓할 수는 없다. 미의 표본을 제시한 그리스 시대에도 ‘아름다운 것은 선하다’라고 할 정도 미(美)에 관한 찬사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젊음에서 유래한다고 믿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의 아름다움은 정신적 성숙을 동반할 때만이 감동을 준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사람은 화장보다는 덕성에 의해 더욱 아름다워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셰익스피어조차도 ‘겉모습이란 건 가장 지독스런 허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젊음과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갈망이 지나쳐 샹그릴라 신드롬에 빠져 사는지 돌아볼 때이다.       


         

고산_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 건축공학(학사), 환경대학원(석사), 공과대학 건축대학원(박사),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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